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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익의 묘 남쪽 벽에 그려진 벽화. 정몽주가 타살되고 이성계가 조선 왕조를 열자, 박익은 또다시 송계마을로 내려오고 만다. 뒷산이 송악(松岳)이고, 마을이 송계(松溪)인 것은 송도(松都, 開京)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 이성계는 전장에 함께 나섰던 박익에게 공조판서, 형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를 연달아 내리며 조정으로 불러들이려 했다. 하지만 박익은 눈멀고 귀 멀었다는 핑계를 대며 태조가 내린 교지와 예관을 보지도 않고 거절했다. 마지막에는 좌의정을 내렸으나 역시 나서지 않았다. 다섯 번 불렀어도 한 번도 나서질 않아 ‘오징불기(五徵不起)’라고 하는데, 그는 죽음에 이를 때까지 고려를 향한 충절을 지켰다. 그는 네 아들에게 남긴 유언에서 “나는 왕씨의 혼령으로 돌아가거니 와 너희들은 이씨의 세상에 있다. 이미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되었으니 온 힘을 다해 충성을 하라. 선천과 후천으로 부자간에도 시대가 달라 졌다”며 조선에 충성할 것을 당부했다. 박익의 후손들은 이 유언 때 문에 조선시대에 집안이 무사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박익은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 화악산 자락에 묻혔다. 묏자리는 경남의 최고 명당으로 꼽힐 만큼 활달하다. 묘는 사각형으로 고려 양식을 띠 고 있고, 돌단이 둘러져 있어 웅장하다. 이 때문에 두 차례나 도굴당하 는 곤욕을 치렀다. 2000년 9월 두 번째 도굴꾼이 지나간 뒤, 동아대 박 물관 주관으로 무덤 발굴 작업이 진행됐다. 이때 고분벽화와 지석, 혼유석 등이 출토돼 세인들을 놀라게 했다. 밀성밀성 박씨박씨 송은공파송은공파 박익의박익의 후예들후예들 박태준(전 국무총리·포스코 명예회장), 박숙현(전 국회의원), 박재규(전 통일부 장관·경남대 총장), 박판제(초대 환 경부 장관), 박철언(전 국회의원), 박종구(삼구그룹 회장·고려대 교우회장), 박번(동양강철 회장), 박치현(흥아상사 명예회장), 박영석(전 국사편찬위원장), 박영관(세종병원 원장·이사장), 박성상(전 한국은행 총재), 박대성(화가), 박 중훈(영화배우), 박한제(서울대 문리대 교수), 박영진(경남지방경찰청장), 박판현(신라오릉보존회·박씨대종친회 사무 총장), 박희학(송은공파 총무), 박종탁(박씨문화원 원장) 박익박익 무덤에서무덤에서 고분벽화고분벽화 등등 출토출토 고려 말 고분벽화는 존재 자체가 아주 드물다. 천장과 북쪽 그림은 지워지고, 동·서·남쪽 그림은 훼손된 상태지만 빼 어난 솜씨를 확인하기에는 충분한 정도로 남아 있었다. 매화와 대나무가 그려진 동쪽 벽에는 머리를 땋아 올린 세 명의 여자가 손에 찻상과 그릇을 든 채 걷고 있고, 역시 나무가 그려진 서쪽 벽에도 네 명의 남녀와 술병을 들고 있는 한 여자 의 그림이 있다. 남쪽 벽에는 슬픈 눈망울을 한 말의 고삐를 잡고 있는 두 남자가 있다. 고려시대 생활상을 보여주는 거의 유일한 풍속화인 셈이다. 무덤은 다시 덮여 긴 잠에 들어갔고, 벽화는 2005년 2월에 국가문화재 사적 제459호로 지정됐다. 밀성 박씨 송은공파 문중에서는 미려한 고분벽화가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120자의 입지잠(立志箴 )과 168자 의 지신잠(持身箴)을 저술한 송은 박익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벽화묘 전시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600년이 지났 건만, 두 문동 72현으로 꼽히는 송은 박익의 삶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살고 있는 것 같다 • 75송은박익은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