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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daum.net/pjh2071/796445 http://www.travelwriters.co.kr 2007.08.08 06:34 고려 벽화가 출토된 박익의 묘. 송은박익은송은박익은 누구인가누구인가 조선태조조선태조((이성계이성계))가가 내린내린 벼슬벼슬 다섯다섯 차례차례 거절거절 판서판서··좌의정으로좌의정으로 유혹해도유혹해도 ‘ ‘불사이군불사이군’ ’ 불변불변 … … 후손들이후손들이 뜻뜻 기리는기리는 전시관전시관 건립건립 추진추진 송은(松隱) 박익(朴翊, 1332~1398)을 기리는 사당으로 경남 청도의 용강서원, 밀양 덕남사, 산청 신계서원, 거제도 송령사가 있다. 후손들이 많이 모여 사는 동 네에 그의 사당이 있는데, 독특한 것은 그 사당에 모 두 초상화가 모셔져 있다는 점이다. 지금은 박익의 후손인 박대성 화백이 그린 초상화로 통일됐지만, 그 이전에는 비슷하지만 제각기 다른 초상화가 걸려 있 었다. 사당엔 위패만 모셔져 있기 쉬운데 박익의 경 우처럼 초상화가 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묘사한 화상시(畵像詩)가 전해오기 때문이다. 화상시는 박익과 동시대에 살았던 정몽주(鄭夢周), 길 재(吉再) 그리고 변계량(卞季良)이 지었다. 초상화를 보고 정몽주가 먼저 운을 뗐다. “긴 수염 십 척 장신 잘도 그렸네(畵出 長髥十尺身)/ 볼수록 두 얼굴이 참으로 똑같네(看來尤得兩容眞)/ 세상 이치가 자취 없다고 말하지 마소(寞言公道 無形跡)/ 죽 어도 죽지 않은 사람 되겠네(死後猶存不死人).” 정몽주는 박익과 박익의 초상화를 나란히 보고서 이 시를 읊은 것으로 보인 다. 그 자리에 길재와 변계량도 함께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은 정몽주의 시를 차운(次韻)하여 시를 지었다 . “봉황의 눈, 범의 눈썹, 십 척 장신에(鳳目虎眉十尺身)/ 담홍 반백의 두상이 참으로 똑같네(淡紅半白兩相眞)/ 그림으로 선 생 얼굴 살 펴보니(畵圖省識先生面)/ 그림 속에도 죽지 않을 정신 그려져 있네(不死精神影裏人).” 이렇게 읊은 길재는 박익보 다 21살이 어려서 박익을 선생이라 부르고 있다. 그리고 밀양 한 동네 출신으로, 아들의 친구이기도 했던 변계량은 “풍후한 얼굴 덕스 러운 몸매(豊厚形容德有身)/ 아무리 보아도 하늘이 내린 분이네(看看優得出天眞)/ 눈 덮은 긴 눈썹, 무릎에 드리운 수염(眉長 過目髥垂膝)/ 그림과 사람 마주해도 분별하기 어렵겠네(兩對難分影外人)”라고 묘사했다. 정몽주와정몽주와 학문학문 교류교류, , 이성계와이성계와 전장전장 누벼누벼 초상화를 그리고, 그 초상화를 보고 시를 짓는 흥미로운 풍속도가 고려 말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에 정몽주 와 길재가 보았던 박익의 초상화는 언제 소실됐는지 알 수 없다. 훗날 박익의 위패를 모시는 서원이 세워질 때마다 이 화상 시를 근거로 새로운 초상화가 그려지고, 영정 봉안문(奉安文)까지 마련됐다. 박익은 1332년에 태어나 1352년(공민왕 2) 이색(李穡), 박상충(朴尙衷)과 함께 과거에 급제했다. 나이로는 이색보 다 네 살 어리고, 이성계(李成桂)보다 세 살, 정몽주보다 다섯 살이 많았다. 박익은 문인이었지만, 이성계와 함께 전장에 나가 남으로 왜구를, 북으로 홍건적과 여진족을 물리치기도 했다. 벼슬은 예문춘추관과 직제학을 지냈으며 고려가 망하 던 해에 는 예조판서를 역임했다. 박익이 예조판서를 지내기 전, 고향인 밀양 땅 송계마을(현재의 밀양시 부북면 제대리 송 악마을) 에 은둔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정몽주가 이곳에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때 정몽주에게 건넨 시가 있다. “송계마을 숨은 선 비 집을 찾아오셨소(來訪松溪隱士家)/ 석양에 문은 닫혀 있고 꽃이 지는데(夕陽門掩落花多)/ 술통 앞에 두고 나의 깊은 마음을 묻는가(樽前問我幽閑意)/ 주렴 밖에 반쯤 보이는 저 청산이 내 마음이라오(簾外靑山半面斜).” • 74송은박익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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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송은박익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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