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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daum.net/pjh2071/6010993 2009.02.22 01:42 송은송은 선생의선생의 화상운화상운(畵像韻)(畵像韻)을을 지은지은 포은포은 정선생님정선생님 포은포은 정몽주정몽주 畵出長髥十尺身(畵出長髥十尺身(화출장화출장 염십척신염십척신):):긴수염긴수염 십척장신십척장신 그려내었으니그려내었으니 看來尤得兩容眞(看來尤得兩容眞(간래우득양용진간래우득양용진):):볼수록두모습볼수록두모습 같기도하구나같기도하구나. . 莫言公道無形跡(莫言公道無形跡(막언공도막언공도 무형적무형적):):인생무상인생무상 자취없다자취없다 이르지말게이르지말게, , 死後猶存不死人(死後猶存不死人(사후유존불사인사후유존불사인):):사후에도사후에도 안죽는사람그냥안죽는사람그냥 있겠네있겠네. . 덕남서원의 주벽(主壁)인 송은 박익(松隱 朴翊)(1332, 고려 충숙왕후 1년∼1398, 조선 태조 7년)의 초명(初名 )은 박천익(朴天翊) 으로 밀양시 부북면 삽포(현 사포리)에서 은산부원군 문헌공 영균(銀山府院君 文憲公 永均)의 아들로 태어났다. 공민왕조에 관직에 나아가 소감(少監)을 거쳐 예부시랑(禮部侍郞), 세자 이부(世子貳傅)에 임명되어 중서령(中書令)을 겸했으며, 한림문 학(翰林文學)에 천거되어 공양왕조에 이르기 까지 진충보국(盡忠報國)하였다. 29세에「입지잠(立志箴)」·「지신잠(持身箴)」등의 저 술을 통해 선비의 학문 탐 구와 바른 자세를 제시하기도 하였다. 여러 왕조를 거치면서 남으로 왜구와 북의 호적을 평정하여 공적을 세웠다. 그러나 고려의 국 운이 쇠퇴하여 포은이 피살 당하는 날에 선생은『나 역시 고려 왕씨(王氏)의 신하이니 조선 이씨(李氏)의 곡 식을 먹지 않겠다.』하니 제현들이 눈물을 흘리며「박익은 진의사(眞義士)」라 말하고, 고죽군(孤竹君)의 절개와 같다고 하였다. 그 후 선생은 벼슬을 버리고 아우 밀성군 천경(密城君 天卿)과 함께 밀양 고향으로 내려와 삽포의 시냇가에에 솔을 심고 내의 이름을 송 계(松溪)라 부르며 스스로 송은(松隱)이라 호하니, 그것은 모두 구도(舊都) 송도(松都)를 잊지 못하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이었다. 1395 년에 태조가 한양으로 왕 도를 옮긴 뒤 선생에게 공판·형판·예판·이판 등의 벼슬을 내려 불렀으나 불응하였고, 2년 후에 다시 좌상 (左相)으로 불렀으나 거 절하였다. 이에 송은 선생을 세칭 두문동(杜門洞) 72현(賢)이라 부르고, 당시의 포은·목은·야은·도은 등과 도의교(道義交)하여 고 려 팔은(八隱)(8隱-포은 정몽주·목은 이색·야은 길재·도은 이숭인 혹은 성은 김대윤·송은 박천익·동은 이재홍·만은 홍재·휴은 이석주)의 한 분으로 칭한다. 1398년(조선 태조 7)에 서거하니 조정에서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 左議 政)의 증직(贈爵)을 내렸 고, 장례 후 정종이 제문을 내려 제사토록 하였으며, 춘정 변계량이 시호(諡號)를 청하는 상소를 올려 충숙 (忠肅)이란 시호가 내렸다. 송은 선생의 장자인 우당 융(憂堂 朴融)(?∼1428, 세종 10)선생은 정포은의 문인으로 태종 때 문과에 등제( 登第)하여 수찬(修撰)을 거 쳐 여러 군현(郡縣)의 수령을 지냈는데 청백(淸白)으로 일컬어졌으며, 관이 이조정랑(吏曹正郞)에 이르렀다 . 일찍이 경상도 경력(經 歷)으로 있으면서 권근의 입학도설(入學圖說)을 간포(刊布)하고, 유풍(儒風)을 일으키는데 힘썼다. 동국여지 승람에는 왕을 보좌할 인 재라 하였고, 탁영 김일손의 청도 학궁기(學宮記)에는 도도사(道都事) 박융 선생은 큰공이 있었다고 하였으 며, 점필재의 이존록(彛尊 錄) 등에 선생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는데, 임란왜란 때 청도 14 의사(義士)는 모두 선생의 후손들이다. • 46송은 선생의 화상운(畵像韻)을 지은 포은 정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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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송은 선생의 화상운(畵像韻)을 지은 포은 정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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