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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건상 97 에서는그의의도와는달리신학문보다는한문에치중하였으므 로곧중퇴하고미국인선교사게일밑에서영어공부를하였다. 게일과의이러한인연은훗날장건상이미국인디애나주립대학 에입학할수있는계기가되었다.장건상은러일전쟁이종식될 무렵일제의한국내정간섭이노골화되자국권회복을위해실 력을배양해야겠다는결심으로우선일본유학길에올랐다.이러 한그의행동은부모의뜻과는배치되어부모의재정적배려는 기대할수없었으므로장건상은큰고통을감내해야만했다.하 지만장건상은유학의어려움을극복하고무사히일본에도착하 였고장차고국의국권회복을달성하기위해서는우선군사력의 강화가급선무라는판단으로일본해군병학교에입학코자했다. 그러나조선인의입학이허용되지않아처음의의도와는달리 와세다대학정치학과에입학하였다.이당시동경에유학하고 있던천주교유학생50명도일본육군사관학교에입학코자했으 나거부당하자민족차별대우에분개하여혈서로써항거한사건 도있었다. 장건상은와세다대학에서1년간수학하여비록근대적학문 과사상에접할수는있었으나군사교육에대한미련을버리지 못해아쉬워하던차에박영효의주선으로주일미공사이스트레 이크집에서한인유학생50여명과더불어기초적인군사교육 을받을수가있었다.그러나일본당국의압력으로한인들의군 사훈련교육은중단되어버렸다.그러자장건상은2년여의일본 유학을청산하고부산집으로귀향했다.장건상은고국에돌아온지 1년여만에배움의열정을식히지못해부모를줄기차게설득 한결과드디어미국유학길에오를수가있었다.장건상은일본 통감부를통한정상적인유학길은포기하고시베리아육로로미 국을건너가는험난한대장정의길을택했다.1908년3월장건상은 지참금2백원과게일목사가써준미국대학추천장을가지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