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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부산을빛낸인물(Ⅰ) 94 하자공격명령을내려무장해제를단행했다.이렇듯자유시사변 은사할린의용군이러시아적군의포위와집중공격에쓰러진참 변이었던것이다. 이사건은근본적으로는이르쿠츠크파고려공산당과상해파 고려공산당간의대립투쟁이불러일으킨사건이었다.이전투끝 에무장해제를당한사할린의용대는전사자․도망자를제외한 864명전원이포로가되었다.자유시사변은한인독립군600여명 이사망또는행방불명이되면서독립군사이에씻을수없는 반목과상처를남긴사건이되었다. 자유시사변이일어나자,만주지역11개(간도국민회,군민단,광 복단,신민단,농민회,공의단(公義團),태극단,농무회,의민단, 청년독립단,야단野團)독립운동단체들은이사건이우리민족 자체의분열에의해발생한참사라는것을성토하고국내외관 계기관에도항의문을발송하였다.이때이봉우는구춘선과함께 간도국민회대표로서참가하고있었다.이봉우는자유시참변이 있고난뒤난립한재만독립단체들의통합이시급함을절감하 고항일운동단체의통일적규합을위해상해임시정부로가는도 중1921년9월23일연길현다두구(茶頭溝)근처에서일본관헌에 의해흉탄에맞고순국하였다.당시그의나이49세였다.그의 부인역시남편을따라만주로망명한후조국광복운동에숨은 공이컸다.장남성신(誠信)은부친이봉우의유지를받들어부 친사후가족들과같이국내에일시귀국하여가장으로서집안 을돌보다가1927년5월다시만주로이주하였는데해방후부 친의묘소가있는연길현노두구(老頭溝)에서별세하였다.2남 상필(相弼)은1919년3월13일연길현국자가(局子街)3․1운동 과관련하여일본영사관원의심한고문으로순사하였고,3남상 준(相俊)은1920년간도용정에서학생독립운동관계로체포되어 경성으로압송되었다가석방되자곧바로중국광동으로가서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