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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한나 77 8․15이후양한나는여성운동에본격적으로투신하게된다. 하나의인격체로대우받지못하고남성의부속물로취급되던당시 여성의인권에대한문제의식이유달리강렬했던양한나는,이 것이자신의남은생을바칠부분이라는인식을가졌던듯하다. 먼저양한나는여성범죄자를전담하기위한여자경찰의필 요성을절감하고여자경찰서창설을주장,당시대통령이었던이 승만에게직접건의함으로써1946년여자경찰서가창설되었고, 초대서울여자경찰서서장에는양한나가취임하였다. 그러나야심차게시작한여자경찰서장활동은뜻밖의암초에 걸려좌초하고말았다.양한나는자신의임명권자였던수도청장 장택상과시국관에서차이가있었고,그런이유로때때로대립하 거나언쟁을벌이기까지했다.결국이것이화근이되어양한나 는경찰서장직위에서해직되고말았다.비록표면적인사유는 조사를받던피의자에대한폭행이었지만,실질적인이유는장택 상과의불화에있었던것이다.이에따라자연히여자경찰서도 폐지되고말았다.여자경찰서는폐지되었지만,양한나가제기하 였던여경의필요성만은부정할수없는것이었기때문에뒤에 여자경찰서는경찰서여성계로축소되어보존하게되었다. 여자경찰서활동이마무리된후양한나는부산으로왔다.이후 양한나의활동은사회복지사업과YWCA의지역조직을건설하 는것에집중되었다.일제시기부터오랫동안YWCA활동에적 극적으로참여했던양한나는부산에정착하게되면서부산 YWCA를조직하는일에본격적으로나섰다.그결과1946년7 월1일부산YWCA를창립하고초대회장을역임했다. 이와함께양한나는고아들을돌보는일을시작했다.1946년 무렵양한나는서구아미동2가에오갈데없는고아55명을수용 하게되었는데이것이후일부산최초의사회복지단체인자매여숙 (姉妹女塾)의단초가되었다.1950년한국전쟁이터지고부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