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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부산을빛낸인물(Ⅰ) 76 에도활발히참여하였다.한편으로양한나는1924년이화여자전문 학교유치과를마치고약2년여동안이화여전에서교사로근무 하였다.이후양한나의일생은유아교육과여성운동이라는것을 양날개로진행되었다. 1928년양한나는호주의선교재단이통영에설립한진명학교 에부설진명유치원을설립하였다.이후1935년까지양한나는진 명유치원을통해자신의교육관을실천에옮기기는데혼신의 힘을다하였다.그결과진명유치원의운영은성공적이었고,이 것은양한나의인생에서또하나의자산이되었다.진명유치원의 경험은노년에접어든양한나가마지막생을바친,고아와불우 한여성을돌보기위해설립한자매여숙의운영에소중한밑거 름이되었기때문이다. 1936년즈음양한나는45세라는늦은나이로결혼을하였다. 그간독립운동과사회활동에매진하느라저만치밀쳐두었던 결혼이었다.어떻게보면양한나는애초부터하나의가정을꾸리 고거기에충실하는현모양처로서의삶에대해서는무관심했던 것같다.그런양한나에게“이제는평범한여성의삶을살것”을 권유한것이중매를섰던이들의얘기로미루어보아,양한나는 결혼을통해세상의가치관과일정하게타협을한셈이었다. 양한나의결혼상대는여류서양화가나혜석의전(前)남편이었 던김우영(金雨英)이었다.김우영은원래변호사출신으로,일제 강점기에만주안동의일본영사관부영사,중추원참의,충청남 도산업부장과같은고관을지냈던탓에친일파라는지적을받 아1948년국회의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기소되 기도했다.그러나한편으로김우영은부영사시절인1923년에 의열단의폭탄이만주를거쳐국내로반입하는과정에서도움을 주기도하는등간단치않은경력의소유자였다.이런일들이감 안이되어김우영은반민특위에서병보석으로풀려났던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