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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한나 75 휴대하고일본나가사키[長崎]를거쳐부산으로입국하던중일본 경찰의의심을받은일이있었는데,이때양한나는오히려“의심 이들거든한번보시오라고대담하게응수하여위기를넘겼다 는이야기도있다.그러나일제에게요시찰인물로낙인이찍혀 시국사건이있을때마다불려가곤욕을치러야하는것만은피 할수없는일이었다. 임시정부초기는상하이와한반도사이에연통제(聯通制)가활 발하던시기였던만큼,양한나의임시정부활동은아마도연통제 와관련하여이해할수있을것이다.연통제란임시정부가국내 와해외에있는동포들의독립정신을고취하고각지의동지들 을규합하기위해조직한교통연락방법이자,지방행정체제였 다.따라서이제도를시행하여임시정부의경상세입을삼는한 편동포와정부의연결을강화하려한것이었다. 당시의여성으로서는매우이례적이라할만큼적극적으로,양 한나가독립운동에투신하게된계기는정확히알려져있지않 다.안창호가일정하게영향을미쳤을것으로생각되지만그것이 애초의동기는아니었을것이다.단지양한나의모교인부산진일 신여학교나첫근무지였던마산의신학교가모두3․1운동에적 극적으로참여할정도로민족주의적정서가강렬하였다는것을 통해,막연하게짐작할수있을뿐이다.한가지덧붙인다면,요코 하마신학교유학시절에일본사회에만연해있던조선인차별 을절감했을지도모를일이다. 그러나1922년무렵임시정부의연통제가와해되면서양한나 는일단임시정부관련활동을중단했던것으로보인다.이후양 한나는YWCA를중심으로하는여성운동에몰두하면서한편으 로유아교육에관심을집중하였다. 1923년무렵양한나는모교인동래일신여학교(현동래여자고 등학교)의청년회총무로활동하면서,서울의YWCA연합회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