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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출 45 목적을맑스주의경제학으로해결할수있겠다는생각에서생물 학에서경제학연구로방향을전환하였다.그리하여그는1930년 경도(京都)제국대학경제학부에입학하였다.여기서박영출은새 로운사상을접하게되었고,1934년3월대학졸업을전후한시 기에완전히공산주의사상에공명하기에이른것으로보인다. 박영출은잠시귀국해있던1931년5월박길문(朴吉文),최정 해(崔貞海)등5명의유학생과함께동래수안동광장에서일제 의탄압과식민지정책을규탄하는강연회를열었다.강연회에서 박영출은일본제국주의침략정책의진상과야만적인식민지교 육정책을신랄하게비판하였고,청중들은박수를보내며호응했다. 이에놀란일제경찰은청중들을강압적으로해산시켰고,박영출은 청중과합세하여일제에항거하였다.이른바유학생귀국강연회 사건인데,박영출은이것을주도한혐의로투옥되어,징역6월에 집행유예2년의선고를받고풀려났다.또한그는대학졸업을1년 앞둔1933년2월에공산주의운동을원조하였다는혐의로검거 되어그해5월에기소유예처분을받기도하였다.이처럼박영 출은고달픈일본유학생활속에서도일제의조선지배와탄압에 꿋꿋하게맞서독립투쟁의의지를더욱더불태웠다. 1934년봄에귀국한박영출은외숙부김철수의감화를받아뜻 을같이하는젊은독립투사10명으로구성된조선광복청년회라 는비밀결사대를조직하여활동하였다한다.그는“자연은인간 을자유와행복으로조성하는데일제는조선인을사악과노예와 불행을조성한다”고호소하며자유주의교육을제창하고,일제의 비인도적처사에대하여서울일원에서항일투쟁을전개하였다. 그는또한때신문잡지사기자가되려고준비하기도하였으며, 무엇보다공산주의사상과운동에관심을가지고있었다. 박영출은동경고등사범학교를졸업한울산출신의이관술(李 觀述)을1934년5월서울에서만나,독립운동과공산주의운동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