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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부산을빛낸인물(Ⅰ) 44 학교측에서는불량분자몇명이동맹휴학을선동하였다고하면서 주동자박영출을비롯한학생234명에게정학처분을내렸다.학 부형들은조사위원9명을선정하여학교의방침과학생들의주 장을세밀히조사한후해결책을강구하였다.결국학부모와학 교측의교섭끝에정학처분234명가운데220명은복교조치를 취하고나머지는퇴학당하거나자퇴서를내는선에서마무리되 었다. 1925년7월동맹휴학을주도한박영출은더욱더엄격해진학 교측의감시때문에학생조직활동이어려웠지만,이에굴하지 않고1926년2월이른바‘장산촛불시위사건’을주도하였다.이 것은당직사감마쓰다[松田]가기숙사생이모학생에게‘조선인 은거지근성이많다’고하며크게꾸짖자,이에분개한학생들 이장산계곡에모여촛불을켜고일본인교사배척운동을펼쳐 4학년이하전교생이동맹휴학에들어간사건이다.당시학생회장 이었던박영출은학교측에서주동학생들을색출하여처벌하려 하자,스스로주동자임을자처하였고결국졸업을1개월앞두고 퇴학당하고말았다. 그후박영출은1927년생물학을공부할목적으로일본야마구 찌[山口]고등학교에입학하여1930년에졸업하였다.그는여기 서생물의생성,진화,발전이론을자신이직접발생적으로연 구해보려는강한의욕을가지고학업에몰두하였다.그러나일본 경제공황의여파로비교적다액을요구하는생물학연구비와 생활비를조달할수있는형편이되지못해생물학공부를중단 하였다. 이무렵일본에서는굵직굵직한공산주의검거사건이연일신 문에보도되고있었는데,그러한분위기속에서박영출은점차 맑스주의관련서적을읽기시작하였다.이들서적의독서를통 하여그는종래해결하지못한생물내지인류의생존적본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