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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출 43 심으로전개된기장지역의민족해방운동과지역주민들의항일 의식이표출된것이었다.박영출은이러한민족적인집안분위기 와항일의식이높았던기장의사회적분위기속에서자연스럽게 독립의식과일제지배에대한저항의식을키웠다. 박영출은3․1운동1년뒤인1920년3월에기장공립보통학교 (현기장초등학교)를졸업하였다.그는졸업다음해인1921년 동래(공립)고등보통학교(현동래고등학교)에입학하였다.그의민 족독립의식은동래고보에진학하여조선민족이처한현실을 자각하면서더욱더구체적으로형성되었고서서히표출되기시 작하였다.그는동래까지기차통학을하면서기장학우회의회 장을맡아학생들의단결을도모하며향토애와민족애를길러 나갔다.이후동맹휴학과독립운동을전개할때발휘되었던지도 력은이러한과정에서형성된것이다.한편,그의집은그가15 세되던무렵에가세가기울어져동래로이사하였다.기장최고 대지주였던집안의몰락은‘광복회’와고려상회,그리고동래은행 경영에참여하며독립운동자금을제공한부친의경력과관련이 있는듯하며,1920년11월17일부친박인표의사망이후급격히 가세가기울었던것으로보인다. 박영출은1925년7월동래고보재학중학생동맹휴학을주도 하였다.그는이때5학년에재학중이었으며,전교학생회장과학 급급장직을맡고있었다.1925년4월오오다[大田信之]교장이 부임해와서우리말교내사용을억압하고여러가지학생조직 을만들어식민지교육에순종할것을강요하였다.당시한문을 담당하던이희보선생의억압적인교육방침과이에앞서학교측 에서부당하게학생3명을퇴학시킨일등이학생들의감정을 자극하여박영출을비롯한김석암,최지택,김익수,박길문,김대 봉등동래고보학생300여명은일본인교장의배척과식민지 교육을반대하는결의를하고7월6일부터동맹휴학에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