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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태 35 투쟁은1920년대전반기내내국내신문지면을장식하여민중에 게깊은감명을주었다.당시일제는의열단의무력투쟁을무엇 보다도두려워했으며의열단을박멸하기위해총력을기울였다. 그러나이러한암살,파괴운동으로는조국독립을성취하기어 렵고,역시“민중의일대무장투쟁이아니고는강도일본을구축 할도리가없다”고판단한의열단원들은항일무장투쟁을준비하 기위해1925년8월중순에손문이이끌던중국국민혁명정부의 수도광주(廣州)로내려갔다.이러한방향전환에발맞추어지하 비밀결사조직이었던의열단을중국국민당과같은대중적혁명 정당체제로개편하였다. 의열단원들은1926년초부터황포군관학교(黃浦軍官學校)와중 산(中山大學:중국국민당의청년엘리트당원양성기관)에입학 하여군사기술과정치이론을익혔다.황포군관학교는국민혁명군 간부를양성하기위해설립한것으로,정식명칭은중앙군사정치 학교였으나,광주근교황포에설립되었기때문에황포군관학교로 불렸다.소련의원조와중국공산당의협력을얻어운영되었던황 포군관학교는국공합작의상징이었다. 의열단원들이광주로와서황포군관학교에입교한것은중국 국민혁명이승리하면만주지역을주무대로한본격적인항일무 장투쟁에호조건이마련될것이라고판단하고군사,정치간부로 서소양을함양하여무장투쟁의기반을닦기위함이었다. 당시광주는연소(連蘇),용공(容共),부조공농(扶助工農)의3대 정책에기반을둔국공합작(國共合作)아래제국주의와군벌을 반대하여불타오르던중국국민혁명의진원지요근거지이었다. ‘중국혁명이조국해방의첫걸음’이라고생각한항일운동가들은 이무렵광주로속속집결하기시작하였다. 김병태는1927년2월에개교한황포군관학교무한분교(武漢分校 :무한중앙정치군사학교로불렸다)정치과에입학하였다.무한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