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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법린 31 김법린의묘소서울우이동오른쪽부터부인박순덕 (朴德純)여사,이은상(李殷相),한 사람건너장남인홍(仁鴻) 주도하였으며,1946년이후민주의원과과도입법의원의원으로 선출되는등해방정국의정부수립운동에투신하였다.또한그는 동국대학교교수및이사장에선출되어교육계에몸담기도하였다. 김법린은1948년정부수립후감찰위원회위원,고등고시위 원,고시위원회위원장등을역임하였고,한국전쟁중이던1952 년에제3대문교부장관에임명되었다가1954년한글간소화문제 로문교부장관을사임하였다.1953년에는유네스코한국위원회 위원장이되었으며,1954년에는부산동래에서제3대국회의원에 출마하여당선되는등정치활동에도힘을기울였다.1959년에는 초대원자력원장을맡았고,1962년에는동국대학교에서명예철학 박사학위를받았으며,1963년에는동국대학교총장이되어학교 발전에기여하였다. 김법린은이처럼불교 혁신운동,정치운동,교 육운동에서왕성한활 동을하다가1964년3월 14일심장마비로순직 하였다.향년66세였다. 그는세속을떠났던승 려의신분이었으면서도 불교만을고집하지않았 다.불교대중화에누구보다도앞장섰고,불교와정치의분리를 주장하였다.이런그의주장은불교가독립운동을전개하는한 부분으로서민족구성원들에게항일독립의식을심어주어야할 사명을가져야한다는그의확고한민족애에서나왔다고볼수 있다.그는일제의탄압에맞서항일독립운동에온몸을던졌 고,해방후에는정치활동과교육활동에주력하는등물이흐르 듯막힘없는삶을살았다.이러한그의삶의자취는불교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