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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부산을빛낸인물(Ⅰ) 30 는여기서허영호를비롯한청년승려교사들과함께학생들의 항일민족의식을고취시키는데전력을기울였다.그의제자김태 근(85세,현재울산거주)은그가학생들과숙식을같이하면서주 로영어와역사를가르쳤고,우리민족이반드시독립을쟁취할 수있다고열정적으로강의하였으며,제자개개인이가지고있는 재주를부지런히갈고닦아독립운동에쓸수있도록격려해주 었다고회고하였다. 1930년대후반부터1940년대초반에이르는동안일제는중일 전쟁과태평양전쟁을일으켜조선인을강제로동원하였고,그들 의침략전쟁에조선인을내몰았다.이때김법린도그의인생에서 가장힘든시련의시기를보냈다.1938년11월비밀결사만당이 일제에발각되어동지들이구속되고조직이해체된이른바‘만당 사건’이발생했을때,그도진주경찰서에체포되어3개월동안 수감되었다. 모진고문을받고풀려난김법린은1939년다시범어사로돌 아와4년동안불교전문강원에서강의하다가1942년에‘조선어학 회사건’으로함남홍원경찰서에체포되었다.이조선어학회사건으 로그가원장으로있던범어사금정불교전문강원(현금정중학 교)은강제폐교당하기도하였다.그는1945년1월18일징역2 년에집행유예4년의판결을받고출옥해,악화된건강을회복하 기위해범어사에서요양하며독립투쟁의의지를불태웠다. 범어사에서해방을맞이한김법린은곽상훈,김범부등과함께 8․15에서이름을따온‘일오구락부’를결성하여건국방책에대 해논의하며정부수립운동에뛰어들채비를하였다.또일제시 기불교계혁신운동을주도적으로이끈그는곧조선불교중앙 총무원장에추대되어조선불교재건의임무를맡았다. 김법린은미군정장관하지를만나일본인승려들이머물렀던 사찰을종단에서인수할수있게끔협의하는등불교혁신운동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