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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부산을빛낸인물(Ⅰ) 28 조선의독립을호소하여공감을얻어낼수있었다.이대회는아 시아문제를연구하기위해아시아민족회를열고위원4명을선 정했는데,김법린은중국,인도,시리아대표와함께위원으로선 출되었다.대회가끝난후프랑스로돌아와있던김법린은다시 1927년12월9일~11일룩셈부르크에서개최된피압박민족대회 의간부회에참석하여한국의실정을보고함으로써조선독립의 정당성을국제사회에호소한그의활동을마무리하였다. 이후김법린은프랑스에서의학업을중단하고귀국하였다.그의 귀국은당시불교계의움직임과관련되어있었다.예컨대1927년 3월16일각황사에서개최된재단법인교무원평의원총회는황 운곡(黃雲谷)의발의로귀국여비를보조하기로결정하였다.그의 활동이동아일보에보도되자동지인김상호는전국사찰을돌며 그의귀국여비를마련하였다.또한그는이무렵에불교계를위해 일해달라는편지를받기도하였다.결국김법린은네덜란드에서 출발하여시베리아를거쳐1928년1월14일고국을떠난지8년 만에귀국하였다. 김법린은한달뒤인1928년2월14일귀국후최초의강연을, 소년시절처음으로민족의역사와현실을자각케해주었던범어 사에서가졌다.이후김법린은경성불교전문학교교수로취임하 였고,일본에서보육전문학교를졸업하고서울에서조양유치원의 주임보모로있던박덕순(朴德純)여사와1929년2월에결혼하여 5남4녀를두었다. 김법린은1920년대후반부터1930년대초반까지불교유신운동과 불교청년운동,조선불교선교양종승려대회개최,만당(卍黨)결사 등당시불교계혁신운동의중심에서맹활약하였다.또한그는 불교혁신운동뿐만아니라조선어학회가주관하는조선어사전 편찬회의준비위원으로참가하여조선어보급과문맹퇴치에도 힘을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