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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장춘 279 무렵동래(부산)지역에서는우장춘박사의환국(還國)을추진하는 운동이벌어지고있었다.그때는부산이경상남도산하행정기관 에들어있었는데우장춘박사환국추진은광복후의초대경상남 도지사김병규(金秉圭),경상남도농무국장김종(金鍾),토지행정 청의진정기(陳正基),부산원예고등학교장김흥수(金興洙)등이 중심이되어있었다. 그러나태평양전쟁의종전(終戰)이후우리나라와일본사이 정치적교류가성립되지못한그때였다.귀환절차를밟을수없 었다.귀환절차를밟는다해도세계적인육종학자를한국으로가 게놓아줄것같지도않았다. 우박사는비상수단을썼다.그는일본이한국에서온밀항자와 불법체류자를적발수용해서한국으로되돌려보내는수용소인 오호무라수용소(大村收容所)에자진해가서그가경성(京城;현 재서울)종로구저동이본적이되어있는호적등본을내밀고 한국으로송환해줄것을요구했다.그사실이현장의실무진에 받아들여져며칠을수용소에서지내는사이부산에있는우장춘 박사환국추진위원회에연락이되고재일동포귀환선으로는38회 째인38선(船)신흥환(新興丸)으로1950년3월7일환국을했다. 일본인어머니와부인그리고여섯자녀들은일본에그대로두 고오는단신환국이었다. 그의환국이전에오늘날의동래구온천2동의부산전자공업고 등학교와동래원예고등학교의서쪽지역이자온천초등학교의북 쪽큰길너머지역에있었던일제강점기의도리이농장(鳥井農場) 의경영인도리이가일본으로돌아간뒤의넓은농장에사단법인 한국농업과학연구소를설립하고있었다.이는민간단체로우장춘 박사환국추진위원회가적산토지(일본인이소유하고있던토지)를 한국의농업발전을위해확보해두려는뜻이었다. 우박사는이온천2동자리에서그동안일본에서쌓은육종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