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page

김법린 25 범어사불교중앙포교당에서긴급회의를갖고대책을논의하고 역할을분담하였다.그들은승려와신도들을만세운동에동원하 여서울의거에참가한후각자분담된지역사찰로내려가지방 의거를주도하기로결의하였다.김법린은김상헌과더불어범어 사명정학교와불교전문강원을졸업한인연으로범어사의만세 운동을담당하게되었다.김상헌은1893년2월양산동면금사리 에서태어나범어사에출가하여불가에귀의한사람으로,범어사 지방학림과서울불교중앙학림을졸업하였으며,김법린과는중앙 학림재학시절부터이후독립운동전선에서함께투쟁한절친한 친구이자동지였다. 김법린은3월1일독립선언서를서울시내에배포하고,탑골 공원에서거행된독립선언서낭독식에참가하는등서울시내시 위에동참하였다.3월2일밤김법린은김상헌과함께일제의삼 엄한경계를벗어나경부선기차에몸을실었고,물금역에내려 양산과동래의경계인금정산고당재를넘어범어사청련암에3 월4일도착하였다.그는범어사의원로승려인오성월,이담해, 김경산등을만나서울의만세운동을알렸다.김법린은범어사 중견승려인유석규(劉碩規),김상호등과함께범어사의불교전 문강원과지방학림,명정학교의학인들을규합하여범어사가중 심이되어3월18일동래읍장날을이용하여만세시위를결행하 기로결의하였다.그들은시위에이용할태극기,선언서,격문등 을치밀하게준비하였고,32명의결사대를조직하였다.그리하여 마침내3월18일과19일동래시장을중심으로범어사학생들의 역사적인의거가일어났던것이다.이사건으로허영호,김봉환, 차상명,김한기,이영우,황원석등33명이징역형을선고받았다. 김법린은범어사의거를주도적으로계획한후의거에는참가 하지않고,곧바로서울로돌아왔다.그는만세운동주동자를체 포하기위한일제의감시와탄압이거세어지자국내불교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