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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부산을빛낸인물(Ⅰ) 262 영보단비부산시동래구마안산기슭 선무라고생각하고,이를적극 적으로실천하였다.이미예순 이넘도록서당교육에몸을바 쳐온유학자가신학문교육의필 요성을주장하고,신학교의운 영․책임을맡고나선일은이 시대에매우드문일이었다. 대한제국의기울어져가는운명 을이미돌이킬수없게되었을 무렵,추호는나이이미일흔을넘긴노인이었다.1909년동래부 의옛민적이폐기되자추호는동래지방의원로들과더불어옛 민적을불태워영보단에묻고는조상의이름을묻은터를후세 사람들이잊지않도록비석을남겨두었다.그처럼국권을회복 하고국가를부강하게하자는추호의신학문장려운동은비록 당대에실효를거두지못하였지만,그의지도아래교육받은후 학들은여러방면에서외세의압제와투쟁하고민족의독립을 위해헌신한사람들이많았다. 청빈한 생활 추호는평생을청빈하게살았다.추호의장남하성(夏成)은중 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지내고함흥부참서관과합천군수를역 임하였으며.차남하용(夏鏞)은공립소학교부교원이었다.추호의 부인인안인(安人)손씨(孫氏)또한여학교정정의숙이설립되자 그곳의국문교사로취임하였다.이처럼추호의부인과두아들 모두교육자또는관리로서상당한대우를받을수있는처지에 있었다. 그럼에도추호의생계는그렇게넉넉한편은아니었다.계묘년 (1903)여름흉년으로인하여식량이모자랄지경이되자,추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