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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필채 257 김병훈(金秉勳)등동래지역의명사들과함께교유하였다.입헌 이세상을떠난뒤1868년동래부사로부임한해소(海所)정현덕 (鄭顯德),1876년수신사로일본에간김기수(金綺秀),그뒤 1880년일본을다녀온시인추금(秋琴)강위(姜瑋)등과교유하 면서학문을쌓았다. 동래지역서당훈장으로서추호의명성은일찍부터알려졌다. 그랬기때문에동래에부임한동래부사들도추호에게자제들의 교육을부탁하는이가많았다.그는47세때지방유림의추천을 받아동래부의면훈장(面訓長)의직책을맡았고,58세때성균관 박사(博士)의직함을받았다.당시갑오개혁으로과거제도가철 폐됨으로써한학(漢學)을전수하던유생들의반발이적지않았는 데,정부에서는이러한불만을해소하기위하여명목으로각지 방에서명성이높은학자들에게성균관박사라는직함을주었다. 추호는이미예순을앞두고있는나이라실제로부임하여직책 을수행하지는않았으나,평생학문과교육에종사한사람으로서 는영예로운일이었다. 개항장의 교육자 - 천하만국과 나란히 동래․부산지역은예로부터바다건너일본과마주하는곳으 로외국과의접촉이빈번한곳이었다.1876년외국과의교역을 위하여항구가개방되면서,부산항을통한외국과의교섭은더욱 활발해졌다. 당시유학자들중에는외국과의문물교류와통상을극력반대 하는사람들이많았다.국내정치가불안하고국가경제도건실하 지못한터에,강력한무력과새로운기술을앞세우고통상의압 력을가해오는외세에대한불신감이팽배해있었기때문이었다. 그러나동래․부산지방의선비들은일찍부터왜관을통하여외 국문화와접촉하고있었기때문에외래문화에대하여매우관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