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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동 243 초기고려신학교교수들과함께 20일부산일신여학교(현재금성중․고교)강당에서신학교개교식 을거행하였다.신학교명칭은《고려신학교》였다. 그러나이때경남노회내에서내분의조짐이보이기시작하였다. 그것은일제시대신사참배를반대하고투옥되었던한상동,주남 선등의고려신학교중심목회자들과신사참배를감수했던대다 수의기존교회지도자들사이의피할수없는갈등에서생겨난 것이었다. 1945년12월47회경남노회에서교직자자숙안이통과될때까 지만해도출옥성도들이영향력을발휘할수있었다.그러나 1946년12월48회노회에서일제하에교단경남교구장을지냈던 목사가노회장으로피선되면서사태는역전되었고,오히려고려 신학교학생추천을취소하기로가결함으로고려신학교의존재 자체를부정하기에이르렀다. 이에한상동목사를비롯한고려신학교측목사들(고려파혹은 고신파)은경남노회를탈퇴하고1951년경남법통노회를조직하 였고1952년대한예수교장로회총노회를결성함으로세칭고려 파예수교장로회총회가조직되었다.그후1951년초량교회를떠 나부산에삼일교회를개척한그는박윤선,송상석등과함께고 려파운동의지도자가되었다. 1954년미국에서개최된국제기독교연합회(I.C.C.C.)제2차세 계대회에한상동목사는 박윤선,이약신,박손혁 목사와함께한국대표로 참석했다.이때에그는 훼이스신학교에서명예신 학박사학위를받았다. 1955년3월8일부산서 구암남동34번지대지1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