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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부산을빛낸인물(Ⅰ) 242 출옥성도 목사를찾아와3․1절기념행사주역이되어달라고요청하였다. 한상동목사는단호하게거절하였다.교회가정치에가담하는것 을원치않았다. 공산당은그를감시하며그의목회활동을방해했다.그무렵 모친상의비보를듣고아내와함께남한으로내려왔다.1주일후 돌아갈것을약속하였지만38선경계로말미암아돌아갈수없 게되었다. 한상동목사가모친별세소식을듣고부산신평본가로찾아 갔을때는이미장례식이끝나있었다.그는부산에머물면서한 국교회의형편을알아보았다.신사참배에앞장섰던사람들이회 개없이교권을거머쥐려하고있었다.신학교는조선신학교뿐 이었고보수신학의요람이될신학교가없었다. 1946년6월12일서울에서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가승동교 회에서열렸다.그러나이총회는38선으로국토가차단되어전 국적인총회가되지못하고남쪽만의남부총회가되었다.중요 결의로는1938년제27회총회에서결의했던심사참배결의를 취소하고그것이범죄였다는것을시인하였다.하지만평양산정 현교회에서출옥성도들이제시한심사참배참가자자숙안은논 의조차되지않았다.그리고조선신학교를총회가받아들여직영 하기로가결하였다.총회의소식을들은한상동목사는더욱보 수주의신학교의필요 성을느꼈다. 마침내한상동목사는 1946년6월23일진해 하사관훈련수양관에서 주남선,박윤선목사등 과함께신학강좌를개 최하였으며,1946년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