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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부산을빛낸인물(Ⅰ) 232 오직인술(仁術)을베푸는일을천직으로여기는장기려박사 도이나라가겪어야할어려운와중(渦中)에휩쓸리지않을수 없었다.1950년의6.25한국전쟁으로삶의중심이었던가족과헤 어지지않을수없는운명에놓였다.그는50년12월3일차남 가용(家鏞:현,서울대학교의과대학교수)만데리고부인과함 께가족을평양에남겨둔채남하했는데그것이가족과의영원 한이별이되고말았다.그당시그도차마영원한이별이될줄 을어찌생각이나했겠는가?이데올로기의갈등에서오는전쟁 이끝나면어디에서건만나서단란한가족으로다시결합하리란 생각이었다.그리고그당시는후퇴하던국군을따라나서느라 가족을데리고올여건이되지못했다.그래서평양종로앞에서 마지막으로아내와다른가족을보고는함께남하하지못한것 을일생동안의가장가슴아픈순간이었다고회고하고있다.그 가부산에도착한것은50년12월18일이었다.부산에온그는 곧부산제3육군병원(현,광일초등학교에있었음)에서외과의로 근무하던3일만인12월24일초량교회에예배를보러갔다가기 관원에용공(容共)혐의로잡혀갔으나미국인목사의증원으로 풀려났다.제3육군병원에서는약6개월간봉사를했다.51년6월 에는경남구제위원회의전영창(全永昌)선생과한상동(韓尙東)목 사의요청으로영도구남항동에있던제3교회창고에서천막병 원을차려무료의원을열었다.이것이복음병원의시작이었다. 이때쓰던약품은유엔군산하의민사원조처의구호약품을썼는 데무료환자를감당할수없게된4년째에는어쩔수없이1인 당백원의치료비를받게되었다.56년10월에는미국인선교사 맥스웰의도움으로송도에250평규모의복음병원을짓게되었 는데이것이오늘날의고신의료원이다. 이같은일은그가젊은날의사가되면현대적의료의혜택도 받지못하고생명을잃어가는가난한사람을구하겠다는그날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