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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률 223 백범김구선생1995년1월서울효창 묘소참배공원의백범김구선생의 묘소를참배한이종률, 왼쪽부터김성숙,박진, 신숙,이종률,김창숙 유지법에걸려2년6개월간투옥되었다가출감후수년간서울 지역의민족무산자자녀들의배움터인‘고학당’에서강의를하였 다.1938년에는출판법과치안유지법위반이라는명목으로공주 형무소에한달여복역하는동안모진고문을당하고석방되었 다.조선총독부의발악적탄압이시작된1940년이후경기도가 평에서숯을구워판매하는숯구이생활을시작하였다.이기간 동안자신이가장가치있는정치세력으로평가한조선건국동맹 과협력하며항일지하운동을전개하였다.그러나조선건국동맹에 가입하여활동하지는않았다. 민족자주통일운동의 실천 1)8․15이후의민족건양회운동 이종률은일제가물러난이후에도민족혁명운동의실천이라는 시대적과제가계속되어야하는것으로보고,1946년1월부터민족 건양회(民族建揚會)를조직하여혁명운동을전개하였으며,1945년 8월15일을‘광복절’이아니라‘8․15’라불렀다.그는8․15이후 개인적으로도잘알고있던좌․우진영정치세력과논쟁하는 가운데자신의정치실천노선을‘비좌비우(非左非右)’노선으로표 현하고,백남운과함께조선학 술원의창립,민족언론운동의전 개,민주주의독립전선결성등 다양한활동을전개한다.특히 조선학술원창립에깊숙이참여 하여활동하였고,백남운과함 께근로대중과일반시민을대 상으로정치학과노동문제를강 의하였다. 1946년1월5일드디어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