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page

20세기부산을빛낸인물(Ⅰ) 222 항일운동의대열에본격참여하면서부터그의항일민족운동의 역사가시작되었다. 항일민족운동의 전개 이종률은배재중학시절의공학회(共學會)활동을시작으로본 격적인항일민족운동에참여한다.그는1926년6․10만세항쟁 후경기도경찰부유치장에서만난만해한용운으로부터‘애국자 가되려면사형을당하는의기(義氣)보다도고문을견디는각오 를다져야만된다’라는말을듣고크게감화를받는다.이후일 본와세다대학에진학하면서1927년신간회동경지회결성에참 여하고,국내에수시로드나들며항일운동을전개하였다.1928년 에는‘재일본조선학생스트라이크옹호동맹’을조직하는한편서울 로와서동맹휴학을주도하였다.이해와세다대학에서‘우리말연 구회’사건으로출학당하게된다.1929년에는학생항일운동조 직인성진회(醒進會)활동을통하여광주학생운동을배후에서조 종한혐의로구속되고,이듬해충남예산농고독서회사건의배후 인물에연루되어다시구속되었다. 이종률은민족혁명운동사에서신간회운동의역사적의미를 매우높게평가하였다.특히민족단일당으로서신간회는‘해소’된 것이아니라,총독부의회유와공작에놀아난사회주의세력등 여러내외적요인으로‘해체’된것으로보았다.그는신간회회원 으로서1931년해체의장면을직접목격하는등전후속사정을 잘알수있었던위치에서있었다.그는이무렵경성제대미야 께시까노스께[三宅鹿之助]교수의경제학교실에서세계정세를 비롯한많은정보를보다체계적으로접하였다.신간회해체가 민족혁명운동의이론적․실천적방향에서명백한오류라는사실 을미야께교수로부터도다시확인하게된다. 1936년에는천민들의신분해방투쟁인형평사운동참여로치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