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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부산을빛낸인물(Ⅰ) 204 배급한국수와수수죽으로끼니를때울정도였지만동산은“오 는자막지말고가는자붙들지마라”며원주의불평을무마했 다.비록전쟁중에모인대중이었지만회하(會下)에운집한납 자들로인하여범어사금어선원은영산회상(靈山會上)의재현이 라고일컬어질정도로정진수행열기가높았다.1952년6월6일 현충일에동산을법주로전국군경합동위령제(全國軍警合同慰靈 祭)가범어사에서열리게되었다.이때이승만당시대통령과의 기묘한첫만남은뒷날정화불사추진에적지않은도움이되었 다.합동위령제참석차유엔장성을대동했던이대통령은대웅 전단상의삼존불(三尊佛)을손가락으로가리키며석가모니불에 대해서열심히설명하는중이었다.법당에들어오다이모습을 본동산은대통령을향해불호령을했다.“일국의대통령이란분 이부처님께손가락질을한단말이요?”이에대통령은정중히 사과하고재빨리모자를벗고합장하며삼배를올렸다.그러자 주한사절들도모두함께따라서참배했다.이것이인연이되어 이대통령은백성욱(白性郁)전내무장관을보내국무총리가되 어국사를도와달라고세번이나요청을했다.그러나동산은 “불법이바로서야나라가흥왕(興旺)할수있다”며수도승들이 국가를위해수행에전념할수있도록뒷받침해줄것을부탁했다. 1954년8월동산과효봉(曉峰)등64명이선학원에모여제1차 전국비구승대회를열고불교정화방침을결정하기에이르렀다. 이어9월에는제1차불교중앙종회를개최하고동산등300명이 단식(斷食)기도에돌입하였다.11월에는새로운종헌(宗憲)아래 종정에동산,총무원도총섭(都摠攝)에청담(靑潭)이각각선출되 었다.그후에도숱한우여곡절을겪은끝에1955년제5차「불 교정화수습대책위원회」에서신종단구성에관한제문제가가결 되었다.이듬해동산은네팔의수도카투만두에서열린제4차세 계불교도대회에참가했다.효봉,청담과함께한국대표로참석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