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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부산을빛낸인물(Ⅰ) 186 받았다.나머지11명모두는2심에서8개월실형을선고받았다. 이들중김인규를제외한나머지10명은당시상황으로보아법 정투쟁을하더라도현실성이없다고판단하고상고를포기했다. 김인규역시서울고등법원에상고했으나기각되어결국11인모 두는8개월옥고를치렀다.이들중김선갑과김명수두사람은 옥중생활의후유증으로출옥후2주일만에순국했다.이를통해 서당시일제의부산항일학생의거에대한탄압이얼마나혹독했 는지를알수있다.뿐만아니라양교는일제관헌의압력에못 이겨자체적인학생처벌을감행했는데퇴학21명,정학44명,견 책10명의희생자를내었다. 부산항일학생의거는표면적으로는일제의전시체제하군사집 체훈련과정인제2회경남학도전력증강국방대회의부정판결에 대한항거에서비롯된것으로보인다.하지만이의거의근저에 는일제에대한학생들의항일의식과그것을조직적으로표출할 수있는운동의경험이바탕이되었음은분명하다.이는이사건 의영향하에1943년과44년조선독립당과순국당결성,추진운 동이있었음을돌이켜보면이를충분히짐작할수있다.또한 이사건은일제말기에전개된최후의대규모학생투쟁으로발 생당시일제의보도통제로말미암아타지방에는잘알려지지않 았으나만약보도만될수있었더라면광주학생운동보다도더 한파급효과를가져왔을것이다. • 김선갑(金銑甲,1921~1942) 감선갑은일제강점기인1940년부산제2상업학교4학년재학 시부산항일학생의거에주동자15명가운데한사람으로,당시학 생의거를이끌다일경에체포되어1941년대구복심법원에서징 역8월형이확정되어,1년여의옥고를치르고출옥하였다.그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