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page

부산항일학생의거 185 했다.이때총을가진학생들과일부하급생은골목길을빠져나 가서동래가는전차를탔고,주력부대인4,5학년및영주동근 처에거주하는학생들은영주동쪽으로가는산길을걸어갔다. 이태추유복이구부산일보사뒤다와라(俵)재목점모퉁이에서 영주동길을인도해주었다.김영근,허현교사는길을막고있 었고남장수는붙들려곧바로집으로갔다.길을막던두교사 의마음은제자들이다칠것을염려한스승으로서책임감에서 나온것이었다.어쨌든모여든200여명의학생들은영주터널오 른쪽에위치한노다이집에8시경에도착하여돌세례를퍼부었 다.이렇게하여학생들이돌아갈10시무렵부산헌병대는각경 찰서에긴급지령을내려귀가하는학생들을그날밤대거연행 했다.당일귀가도중에검거된학생들은지금의중부산서(당시 남부산서),동부산서(당시북부산서),영도서등각서의유치장 은물론심지어경남도청의무덕전까지초만원을이루었다.이튿 날에는양교에형사들이배치되어학업은고사하고학교는취 조장으로변했고매일수십명씩양교학생들이경찰서로연행 되었다.연행된학생들은손가락에막대끼우기,물먹이기,코에 고추가루넣기,비행기태우기등혹독한고문에도굴하지않았 다.이당시일경에검거된학생수는약200명에달하며주모자 로지목된양교생15명은송청,투옥되었다.이당시검거된학 생으로는동래중의김인규,김영조,김명수,이달희,,이도윤,이 장원,정두열,추유복,김재한등9명과부산제2상의홍병희,이 병도,이인희,김선갑,이세기,김종배등6명이었는데,당시법률 이18세를형사적성년으로규정했기때문에그중김재한,이인 회,김종배등3명은모두미성년자로서감형되었다.징역8˜10 월형을받은12명은대구형무소로압송되었는데모두대구복심 법원에항소를제기했다.대구형무소에서옥고를겪으면서제2심 을받던중추유복은유복자라는처지가참작되어무죄선고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