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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진일신여학교항일학생운동 175 그녀는환갑도훨씬넘은나이에1974년한국교회여성연합회초 대인권위원장을맡아인권운동에앞장섰으며,구속자가족협의회 회장,YH대책위원회위원등을맡아민주화운동에동분서주하 다경찰차에실려가는수모를당하면서도활발한사회운동을멈 추지않았다. 일신여학교출신으로역사의영욕을같이한인물로는박순천 을들수있다.가정에서는한남자의부인이며7남매의어머니 로서여성계에서는대표적인지식인여성으로정계에서는치마 를두른야당투사로서기억되고있는박순천은우리사회에적 잖은영향을남긴인물중의한명이기도하다.박순천은1898년 9월19일경남동래의기장에서태어났고본명은명련이었다. 1917년일신여학교를졸업한뒤에마산에있던의신여학교교 사로재직하였다.1919년3.1운동당시민족대표33인의한사람 이던이갑성과연결되어마산시위를벌이다가붙잡혀일주일만 에보석으로풀려났다.그러나이때부터일경을피해도피생활을 계속하게되었고그때순천댁이라는가명을사용한것이그뒤 박순천으로세인의입에굳어지게된계기가되었다.이후도일 유학을떠나1926년일본여자대학사회학부를졸업한그녀는대 학3학년재학당시같은동경유학생이던변희용과결혼하였다. 대학을마치고시집인경북고령군으로돌아와서는남편과더 불어야학을일으키고12년동안농촌계몽사업에이바지했다. 그후일제의황민화운동이노골화되면서창씨개명을강요하고 전국방방곡곡에신사를짓기시작하던1936년박순천일가는 정든고향을떠나서울로올라왔다.이때부터박순천은극도의 생활고속에서노동자생활을하다가1940년지금의중앙여자중 고등학교의전신인경성가정의숙의설립을위하여현해탄을건 넜다.경성가정의숙은이왕가의소유건물이었기때문에동경에서 박순천은이우공을만나여학교설립의뜻을밝히고그의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