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page

동래고보항일학생운동 147 동래고등학교구교사전경 중태였으므로역시병보석으로출옥했다.그러나김성조는이미 손을댈수없을정도로병이악화되었고,이후얼마동안치료 를받았지만사망했다.김성조장례때학교에서는이광욱교사 가앞장서서조기와만장을들고전교생이동래에서만덕고개를 넘어서장지로갔는데,구포가생긴이래로제일많은조객이모 여든장례식이었다.이때일본경찰은김성조가3․1운동에참가 했다가수감되어병보석중에죽었으니옥사와다름없으므로군 중들이모여재차시위를할까두려워하여조객이모여드는것 을방해했다.그러나일제가그럴수록조객은더욱더불어나1천 여명이나되고만장과조기는수백을헤아렸다.동고학생들은 붉은글을쓴만장을만들어장대에높이달고만덕쪽장지를 향해상렬을따랐다.복역자중김귀룡역시옥중에서병을얻어 그것이고질병이되어평생을고생하다가세상을떴다. 한편시일이지나수감중이던학생들도형기를마치고복교 를허락받았으나태반은학교에나오지않고실의에빠져자퇴 하는경우도있었다.특히3학년중등교하는학생은4․5명에 불과하여학교당국은학교운영상부득이3학년을2학년에합 쳤다.이때문에1920년도동고졸업생은배출되지못했다.이후 4학년으로서복역을 마치고나온학생 들은학교에서개별 적으로졸업장을수 여했다. 1920년대 흑조회와 동맹휴학투쟁 이러한역사적경험은1920년대로이어져부산시내의각급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