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page

20세기부산을빛낸인물(Ⅰ) 12 그나라의노예가될것을원한다면조선민족은세세생생(世世 生生)노예의한길을윤회하게된다”며이승만의위임통치청원 을비난하고아울러이승만을수반으로하는임시정부와임시의 정원을부정하였다.이들은그대신1919년4월23일국내에서 국민대회명의로선포된한성정부(漢城政府)의법통을잇는‘대 조선공화국(大朝鮮共和國)’을수립하여민족해방운동의최고기관 으로받들고,그아래에각지의독립군부대를통합하고,지휘 계통을통일하여‘대조선국민군’으로편성하여군사통일을이룩 하고자하였다.이들은이상룡(李相龍)을수반으로하는조각인 선까지마쳤다.이때김갑은재무총장(財務總長)에선임되었다. 하지만이러한성급하고격정적인조치는실행에옮겨질수 없었다.그러나그영향은컸다.그것은한편으로임시정부의존 폐문제와관련하여국내외독립운동의방향을재정립하려는국 민대표회의의소집계기를마련하였고다른한편으로는남북만 주와연해주에서독립군단의통합운동을촉진하였다. 이승만이상해에머물지않고미국에서지낸것도임시정부 침체의한요인이었다.그는성화에못이겨1920년12월부터약 6개월동안상해에부임하긴했지만임시정부의갈등을더심화 시킨채태평양회의에참석한다는명분아래하와이로돌아가 버렸다.하지만태평양회의(1921.11.11~1922.2.6)에한국대 표단은참석할수없었을뿐아니라한반도문제는상정조차되 지않았다.오히려태평양에서일본의세력강화와국제정세의 안정이란결과를가져왔다.외교독립노선에입각하여외교활동 에치중했던임시정부의권위는다시크게실추되었다. 이러한상황에서1923년1월,임시정부를그대로고수하려는 고수파를제외한거의모든국내외독립운동지도자들이한자 리에모여국민대표회의를개최하였다.김갑은국내13도총간부 의자격으로참석하여국민대표회의참가자의자격을심사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