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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지역항일민족운동 137 4월8일밤10시에는노동자와부인등70여명이주동이되 어만세시위를벌였다.일본군경은시위를제지,해산하기위해 발포를하였다.일본군경의무력탄압으로시위대는해산당하 였으나군중들의항쟁의식은사그라지지않았다. 4월10일은역시기장장날이었는데,오전9시경기장공립보통 학교교정에서학생약50명이집합하여‘대한독립만세’를부르 며만세시위운동을전개하였다.이날좌천장안면에서는약500 명의군중이만세운동을일으켰고이를제지하기위해일본경 찰들이발포한일이발생하였다.이처럼독립을요구하는민중들 의열기는일본경찰의위협과발포에도불구하고쉽사리꺾이 지않았다. 이날밤9시경에는1천여명의군중이다시시장으로몰려들 었다.이들은독립만세를부르며시위를시작하였고,시위는밤 을새워계속되었다.일본경찰들은시위군중을해산시키려노력 을하였으나제지가어렵게되자11일새벽1시무차별발포를 하여시위군중을해산시켰다. 이처럼4월5일부터기장읍에서발생한독립만세시위운동은 일제의탄압과방해에도불구하고8일,10일에도계속진행되었 다.뿐만아니라인근지역에영향을끼쳐정관좌천일광등지 에서도만세시위운동이일어났다. 기장읍만세운동을주동하여투옥된인물들은최고2년6개월 부터최하8개월의징역언도를받았는데,김도엽권철암구수암 김수룡이택규최기복최창용오기원장봉기등은공소하여대 구복심법원에서형의선고를받고,서대문,대구,부산감옥에서 각각복역하였다.그중구수암은옥중에서고문의후유증으로 병을얻어다음해(1920년)봄에집행정지로출옥하였으나,그해 여름에20세의나이로사망하고말았다.당시검거된주동자들과 그들의형량은다음과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