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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부산을빛낸인물(Ⅰ) 124 형석을중국에남겨두고왔다.떠나올때낡은태극기와고향에 서가져온한줌의흙을차남형석에게꼭쥐어주면서나라와 고향을잊어서는안된다고당부하였다.그태극기와한줌의흙은 아들형석을항일가극인으로서독립운동에매진하게끔하였다. 2차귀국후한흥교는주위의권유로대동병원을운영하면서 가계를돌보았다.그러면서도여전히그는동래지역의민족․사 회운동에관여하였다.당시동래지역의사회운동은청년운동가 들의계속되는검거로침체위기에빠져있었다.어려운여건속에 서지역의여론기관으로출현한것이1930년에결성된경오구 락부(庚午俱樂部)였다.한흥교는“종래극도로소격(疏隔)되어있 던동읍내중년측과청년측의가능한정도까지의연락을짓고 아울러지방발전의충실을도모한다”는취지로조직된경오구 락부의구성원으로참여하였다.이시기그의활동에대해자세 히언급하는것은무리지만,중국에서의그의이력,경오구락부 의구성원으로참여하고있는점,신간회동래지회원인한우교와 형제인점,병원장이라는직함등을고려하면동래의민족사회운 동과직간접적으로연결되어있었음을추측하기는어렵지않다. 여하튼한흥교는1932년만주를거쳐다시중국으로건너갔다. 이번에는북경천진(天津)등지로돌아다니며한중연합항일운동 에앞장섰다.그가해방을맞은것은임시정부와한독당(韓獨黨) 의산서성(山西省)태원(太原)대표로있을때였다.1946년5월 한흥교는태원지구에있던3백명의동포들과함께조국땅을밟 았다.한흥교는고향동래로돌아와얼마동안쉬다가마산도립 병원원장으로근무하였다.그뒤이승만의독재에회의를품고 정치에뜻을두어진보당초대경남위원장등을지내다가1967년 8월82세로타계하였다. 26세에춘일환을탔던작은체구의허약한청년을쉼없는‘독 립’의길로이끈것은조국을향한애틋한사랑이었다.보는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