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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흥교 123 일본경찰의감시가잇따랐고,사흘이멀다하고경찰에불려다녀 야했다.결국1년6개월간의생활을뒤로하고한흥교는다시 중국으로건너갔다. 다시금찾은중국에서한흥교는중국재정부인쇄국의무실에 서근무하면서본격적인독립운동을시작하였다.1919년3.1운동 이일어난직후한흥교는중국경사(京師)전염병원으로자리를 옮겼다.약간의경제적여유가생기자독립운동을지원하면서신 문을만들어항일운동을전개하였다.2~3명의동지들과중외통 신사(中外通信社)와신광신보사(晨光新報社)를만들어한글과 한문으로중외통신과신광신보를간행하여국내는물론러시아 와구미각지로발송하였다.또한앞잡이라는기관지를발행하 여‘한생(恨生)’이라는필명으로일본의침략성과민족독립의타 당성을호소하기도하였다. 이즈음한흥교는상해임시정부와의열단의북경주재대표로도 활약하였다.중외통신사를경영하던그는국내외에서임시정부로 들어오는통신이나서류의전달을담당하였다.북경에비밀리에 거주하는독립운동가들에게는두아들이분담하여독립선언문과 기관지를직접배달하기도하고,그후5,6년동안집합통지와 비밀연락심부름을하기도하였다.한번은여름방학을맞아귀국 하는그의맏아들에게,안희제(安熙濟)에게전하는편지1통을 주면서심부름시킨일도있었다고한다.이어중국으로돌아갈 때안희제에게서받은편지1통에는거액이들어있었는데,그것 은상해임시정부요인이던김갑(金甲)에게보내는것이었다고 한다.국내외연락책으로도활발히활동한탓에한흥교의가족은 지겹도록이사를다녀야될정도였다. 한흥교가두번째로조국땅을밟은것은1927년이었다.그의 삶에서늘든든한버팀목이었던부친이별세하였기때문이었다. 귀국직전한흥교는학업문제로고등학교에재학중이던차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