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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부산을빛낸인물(Ⅰ) 122 중국혁명군군의관소령시절 병원에서근무하였으나무고한밀고 로말미암아상해로몸을피할수 밖에없었다.1914년상해로다시 돌아온한흥교는천동동제의원(天東 同濟醫院)을개업했다.한국인동지 들의소개와중국국민당요인들의 도움으로병원운영이안정을찾아 가던즈음,중국에서3차혁명이일 어나병원경영이어려워졌고얼마 못가문을닫게된다. 병원폐업으로허탈해있던한흥 교의손을잡아준것은결의형제 를맺은장지신이었다.장지신은한흥교를그의고향절강성(浙 江省)가흥(嘉興)으로데려가장씨가의빈민구호를위해사회사 업의일환으로세운진료소일을맡겼다.한흥교는진료소에서 나오는적지않은수입으로독립운동가들의뒷바라지를하였다. 많은독립운동가들의뒷바라지를하기에는턱없이모자란수입 이었지만,한흥교혼자몸이었기에그럭저럭버텨나갈수있었다. 부산동래에있던그의부인과원석(元錫),형석(亨錫)두아들 을한흥교의동생정교(正敎)가데리고나타난것은1915년10월 중순경이었다.가족들의생계와맞물려독립운동가들의뒷바라지 의자유로움이예전만못하게되었고,무엇보다두아들에게한 국식교육을시킬수없는것이큰고민이었다. 그러던1916년3월,고향에있는모친이위독하다는소식이전해 지자한흥교는가족과함께귀국한다.고향에돌아온한흥교는 부친과가족들의권유로동래에살고있는석천(昔泉)오종식(吳 宗植)의사랑채를빌어대동병원(大同病院)을개업하였다.그러나 빼앗긴조국에서의생활은자유롭지못했다.한흥교의주위에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