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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부산을빛낸인물(Ⅰ) 106 (金仁浩)의증언처럼소정은부산지역3․1운동당시‘학생들의 배후에서만세운동에깊이관여’했음을짐작할수있다.이무 렵최천택이세간에널리알려진계기는1920년의열단원박재 혁의부산경찰서폭탄사건일것이다.부산공립상업학교동기동창 오택(오재영,신간회부산지회조사부장)과함께의형제결의를 맺은박재혁이중국상하이에서의열단장김원봉으로부터폭탄 을넘겨받고부산에들어와폭탄투척하루전까지소정과지내 다부산경찰서에폭탄을던진것이었다.검거된박재혁이끝까지 단독범이라고우긴탓에소정은1920년10월16일기소유예로 풀려날수있었다.그러나소정은이후구세단조직때밀양의김 원봉과맺은인연때문인지1920년12월의열단최수봉(崔壽鳳) 의밀양경찰서폭탄사건,1923년강홍렬(1949년반민특위경남지 부장)의의열단군자금모집사건에각각연루되어일본경찰로부 터혹독한취조에시달렸다.이런점을미루어볼때소정자신 이직접의열단원이었던것은아니지만의열단과직간접적으로 상당한연계를맺고있었던것으로여겨진다. 이후소정은1921년8월,당시일본에건너가기위해부산에 체류하고있던유랑노동자들의주택문제를해결하고자백산상회 의안희제(安熙濟)와김철수(金喆壽,해방후경남도지사)등과주 택구제부산시민대회를개최하여도항민(渡航民)의권익을옹호 하였다. 1924년에는김국태(金局泰)와함께『시대일보』부산지국을 설치해언론운동을전개했는데,친일종교단체인보천교(普天敎) 에서1925년『시대일보』를인수하려하자전국지국의단결을 촉발시켜결국무산시켰다. 한편3․1운동이후국내의민족운동이청년회조직을통한실 력양성운동으로바뀌자부산에서도1920년말7곳(부산진,초량, 고관,영주동,영도,부민동,곡정)의청년단체들이하나로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