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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방된 후에는 상소운동의 효과가 없음을 통감하고 죽음으로써 국민에 게 고하여 국민을 분기시켜서 국권회복운동을 일으킬 결심을 하였다. 적 일본과 적신(戰덤프)들의 세력이 조야(朝野)에 가득 차있는 현실에서 우유부단(優柔不斷) 주저하기만 하는 황제에게 상소 건의로 성과를 거두 기란 기대할 수 없는 길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또 지방에서 일어나는 의 병부대의 무력으로도 강력한 일본의 세력을 물리치고 국권을 회복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미 상소문에서도 말한 것처럼 이왕 망할 바에는 최후 한번 죽음으로써 관민의 경각심을 촉구하고 국은에 보답하는 길 밖에 다 른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이 에 선 생 은 유서 2통을 남기 고 1905년 11월 30일 〈자결>하여 순국하 였다 순절(狗節)의 소식이 세상에 알려지자 곡성은 온 장안을 진동하고 일제의 관리들과 외국 공사관에서까지 모두선생의 장렬한 죽음에 대하여 다시금 놀라고 감탄하였다. 황제는 특별히 애도하는 조서를 내리고 관원 을 보내어 조상하고 부조하였으며 관원 · 시민 · 유생 · 학생들이 찾아 조문 하는 이가 길을 메웠다. 순국(狗國) 후 의정대신(議政大닮)에 추증(追觸) , 고종(高宗)의 묘정(關廷)에 배향(配享)되었고·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선생께서 순절하며 국민에게 고하는 유서에는 아, 우리나라 우리민족의 치욕이 이 지경에 다다랐구나. 생존경쟁이 심 한 이 세상에 우리 민족의 운멍이 장차 어찌 될 것인가.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고 죽기를 맹세하는 사람은 살아나갈 수 있으니 이는 여 러문이 잘 알 것이다. 나 영환은 죽음으로써 황은을 갚고 이천만 동포에 게 사죄하러 한다. 영환은 이제 죽어도 흔은 죽지 아니하여 황전에서 여 러분을 돕고자 한다. 바라건대 우리 동모형제여, 천만배나 분려(舊勳)를 더하여 지기(志氣)를 굳게 갖고 학문에 힘쓰며 마음과 마음을 함하고 힘 과 힘을 아울러 우리 자유독림(自由獨교)을 회목할지어다. 나는 지하에서 기꺼이 웃겠노라. 아, 조금도 희망을 잃지 말라.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 에게 마지막으로 고한다. 고 하여 온 국민이 죽음을 맹세하고 분발하여 을 호소하였다. 또한 선생은 각국 공사관에게 보내는 유서에서 98 부천독립운동사 국권회복운동에 나설 7.--1 /、 일본의 한국침략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