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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하고 민권을 확장하여 독립국가의 기초를 튼튼히 하자고 건의했으나 시행되지 못하고 그의 건의에 따라 육군제도만을 개혁하였다. 1898년부터 서재필(徐載폐) . 이상재(李댐在) 등이 지도하는 독립협회(獨 立|값會)가 본격적인 자주민권자강운동을 전개하자 적극적으로 이를 지지 했을 뿐 아니라 독립을 지키기 위해서는 의회(議會)를 개설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 시기에 가장 자주적이고 진보적인 관료로서 정부 내의 적 극적인 독립협회 지지자가 되었다 독립협회가 1898년 10월초부터 수구파 7대신 퇴진과 개혁파정부의 수립 을 요구하는 철야 상소시위를 연일 감행한 결과 1898년 10월 12일 박정양 (*1、定陽)을 수반으로 한 개혁파 내각이 수립되었을 때에는 군부대신 겸 내무대신에 임명되어 군사권과 경찰권을 장악하고 개혁파정부의 실권자로 서 독립협회 운동을 지원하였다 박정양 · 민영환 정부는 즉각 독립협회의 의회설립제안을 받아들여 한국 역사상 최초의 의회(議會)를 개설하기로 결정하고 1898년 11월 2일 중추 원(中樞院)을 의회로 개편하고 의회설립법을 공포하였다. 그러나 민영환 등과 독립협회가 공화정(랐和政)을 수립하려고 한다는 수구파의 모략전술 로 의회설립운동도 좌절되고 그도 파면 당하였다. 1902년 이상재 · 이상설(李相l힘) . 이준(李碼) . 이동휘(李東純) . 양기탁 (씻셀繹) 등과 개혁당(改뀔했) 운동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다가 이상재 는 투옥되고 선생은 견책 당하였다. 선생은 황실의 친척이므로 곧 복직되 어 참정대신, 탁지부대신, 원수부(元폐IJ府) 회계국총장, 장례원경, 표훈원 총재, 헌병사령관의 여러 중요한 직책을 역임하였다. 1904년 2월 일본이 러 · 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일본군을 한국에 상륙시키 어 『한일의정서』 를 강제 체결하고 침략정책을 자행하자, 선생은 고급관 료로서 이를 격렬하게 성토하다가 일본군의 압력과 친일적 각료들과의 대 립으로 한직인 시종무관장(待從武官長)으로 좌천되었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 을 체결하고 국권을 빼앗자, 조병세(돼핏따)와 함께 백관을 거느리고 상소 하여 을사조약에 서명한 5적을 처형할 것과 을사조약의 파기를 요청하였 다. 고종이 이를 듣지 아니하므로 다시 상소를 올리고 대한문(大漢門) 밖에 엎드려 대답을 기다렸으나 일제는 조병세와 민영환 등을 체포하였다. m. 광복후 부천거주 독립운동가 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