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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박치의는 9월 1일 새벽 3시에 이학필과 함께 선천경찰서에 폭탄 을 던져 파괴하고, 최급경고문(最急警告文) 등 수종의 유인물 수십매를 살 포하고 피신하였다. 그러나 일경의 끈질긴 추적으로 선생을 비롯하여 20 여명의 동지들이 동년 9월 7일 모두 체포되었다. 1921년 4월 1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박치의 사형, 김성호 15년 등 전원 이 중형을 언도 받았다. 선생도 이때에 징역 2년형을 언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2년 8월 4일 출옥한 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 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부천에 거주하는 유족으로는 손부(孫揮) 권수자(權秀子) , 증손(曾孫) 문 주연(文柱然) , 증손부(曾孫歸) 이해옥(李海玉) , 고손(高孫) 기현(基鉉) . 기 준(基俊)이 있다 @ 參考文敵 : 身分帳指救照會回報書 韓國獨立史(金承學) 下卷 139面 東亞 日 報(1921. 4. 14字)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7卷 334面 獨효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1輯 182面 獨立有功者功勳錄(國家報勳處) 第4卷 639面 10) 민 영 환 (閔 泳 煥) (186l. 7. 25 - 1905. 11. 3이 자(字) : 문약(文若) 호(號) : 계정(桂底) 민영환(閔泳煥) 선생은 서울 견지동(탤志洞)에서 여흥(鍵興) 민(閔)씨 선혜청 당상(宣惠廳 堂上) 겸호(課鎬)의 아들로 태어나 여성부원군(鍵城府 院君) 민태호(閔泰鎬)에게 입양되었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부모에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며 말을 함부로 하지 않고 여러 아이들과 놀 때 마음에 맞지 않는 일이 있더라도 모나게 드러 내는 일이 없으니 모두들 장래에 큰 인물이 되리라 기대하였다. ill. 광복후 부천거주 독립운동가 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