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page

총동맹(朝應팎{f.總同盟)과 좌 · 우익의 민족통일전선(民族統-→戰線)인 신 간회(新幹會)에도 가입하여 항일(抗日)활동을 펴던 중 1930년 12월 일경 에 피체되어 청진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언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부천에 거주하는 유족으로는 자( .了) 남철(南鐵) 이 있다. @ 參考 文생k : 身分l帳指救照젠l르l해書 日 헤f중’뼈下합~136年史(隊l史編뚫委員떤) 第8싫 5340비 獨~Ù:1J 功휴‘功勳錄(隊l家報勳j週) 節7싫 4091껴j 9) 문 종 우(文 鍾 禹) (1889. 1l. 4 - 1941. 1l. 16) 자(字) 추진(微珍) 문종우(文찮禹) 선생은 평북 용천(龍川) 사람이다. 선생은 1919년 3.1독립운동 후에 만주 유하현(柳河縣)에서 조직된 대 한독립단(大韓獨立團)과 연계하여 군자금 모집 등의 독립운동을 .하였다. 만주의 관전현(寬훨!縣)에서 조직된 광복군 총영(光復軍 總營)에서는 1920년 8월 24일 미국 의원단 일행의 내한(來韓)을 계기로 일제의 주요기 관을 폭파하고, 일제 요인을 주살하여 한국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 리기 위하여 결사대를 파견하였다. 제 1대는 서울에, 제2대는 평양에, 제3 대는 선천과 신의주 방면으로 파견되었다. 제3대의 결사대원 이학필(李學 弼) . 임용일(林龍日) . 김응식(金應植) 등 일행은 당시 17세의 중학생 박치 의(朴治敎)를 비롯한 동지들을 규합하여 선천경찰서 폭파계획을.세웠다. 선생은 제3대의 결사대원과 행동을 함께 하였다 그러나 국경의 경비가 삼엄하게 강화되어 거사에 사용할 무기의 반입이 늦어진 관계로 미국 의 원단이 선천을 통과할 때에 거사의 시기를 놓쳐버렸다. 이에 결사대원들 은 다시 모여 상의한 결과 1920년 9월 1일 결사대원 한 사람이 선천구청 지적창고(地籍용庫)에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되었다. 94 부천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