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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參考文願 : 判決文(1909. 10. 8 光州地方載判所 全州支廳) 獨立i펀動史(國家報勳處) 第1卷 399 . 400面 獨立運펠l史資料集(國家報勳1處) 第1輯 649面 獨立有功者功勳錄(國家報짧}J鼠) 第8卷 336面 金굶道里의 조카 金甲童씨의 證言文 8) 남 윤 구(南 潤 九) (1982. 4. 2 - 1960. 8. 10) 남윤구(南潤九) 선생은 함북 무산(皮山) 사람 이다 1919년 4월 21일 함북 청진(淸律)에서 만세시 위에 참여하였다가 일경에 피체되어 태형 90도형 을 당하고 풀려났다. 그후 남선노농동맹(南蘇勞農同盟)과 전조선 노 농대회(全朝蘇勞農大會)가 합류하여 전국적 규모 를 지닌 노농운동(勞農運動)의 통일적 지도기관 을 목적으로 1924년 4월에 조직된 조선노농총동맹(朝蘇勞農總同盟)의 결 성과정에 참여, 50명의 중앙의 원 중 한 명으로 선출되어 동 동맹을 이끌 었다. 선생은 청진지방을 중심으로 노동자 · 농민의 권익옹호투쟁을 펼쳐 일제 의 정책에 항거하였고 1925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 의 서울청년회 계열이 주도한 전조선노농대회 (全朝蘇勞農大會)의 준비과정에도 참여하였다. 조선 노농총동맹은 1927년 9월 종래 노동자 · 농민운동의 혼합조직이었던 한계 를 극복하고 운동의 성격에 따른 단일조직으로 분립하기로 결정하여, 조 선노동총동맹(朝蘇勞動總同盟)과 조선농민총동맹(朝蘇農民總同盟)으로 나 뉘었는데 선생은 이낙영(李樂永)을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하는 조선노동총 동맹의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똥하였다. 일제는 조선노동총동맹을 탄압하기 위해 모든 집회와 행사를 금지하였 으므로 동 동맹은 1929년 7월 중앙지도기관을 보선하였는데 선생은 이때 재차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조선청년 m 광복후 부천거주 독립운동가 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