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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빨리 들어가서 굴뚝 쪽으로 나가게 되니 바로 담 아래로 나왔다. 몸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중부(까P父)이신 김맹도리를 불끈 들어 담 위에다 올 려놓고 고진사 자신은 획 하며 뛰어 올랐다. 김맹도리 그 분을 옆구리에 끼고 살 포시 내려서 뛰기 시작하였다. 얼마쯤 뛰어 남문에 이르렀다 고진사는 문 쪽으 로 가더니 문이 잠긴 것을 확인하고 다시 와서 김맹도리를 옆구리에 끼고 담장 을 획 하고 뛰어 올라 담 위에서 사방을 살피더니 마치 고양이가 뛰어내리듯 살 포시 내려 뛰었다. 그러더니 “여보게 자네는 부상이 심하니 이 길로 자네 집 쪽 으로 곧바로 논밭 가리지 말고 가게” 그리하여 요천수(參川水)를 끼고 집 쪽으로 걷기 시작하였다. 한참 가다 뒤돌 아보니 고진사는 담뱃대에 불을 붙여 잘 가란듯이 신호를 하더니 사라졌다. 몸을 가누지 못한 김맹도리는 갑자기 외로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집 대문 앞에 이르니 마당에는 모닥불을 피워놓고 호 롱불 아래 부친이신 김학서(金學瑞)옹과 모친이 울고 계셨다. 내일이면 사형집행 될 자식을 생각하면서 서러워하고 계셨던 것이다 마당에는 지게에다 관(植)을 올려놓은 것이 마치 초상집 같았다. 그 때 “어머니”하고 부르며 다가가니 온 집 안 식구가 얼마나 놀랐으며 얼마나 감격했겠는가. 하지만 이대로 집에 있으면 중 부(件父)는 왜경에게 잡힐 것이 분명하니 부친이신 김학서옹(金學瑞쳤)께서는 네 째 아들이신 저의 부친께 “너의 형을 데리고 저 앞 수퉁께(수개관)에다가 은신시 키고 먹을 것과 약을 갖다 놓으라”는 말씀을 했다. 부친께서 중부(件父)이신 김맹도리를 모시고 나간 후 곧이어 왜병들이 들어 닥 쳤다. 와서보니 초상집을 방불케 하니 오지 않았구나 하고 의심치 않고 동네를 뒤지기 시작하였으나 허탕치고 말았으며 중부님은 은신할 수 있었다. 김맹도리는 몸이 회복되자 남원을 피해 김제(金提) . 정읍(井물) . 전주(全州) 등 으로 다니며 피신했다. 그러는 동안 세월은 흘러 여기 저기서 항일투사(抗日潤士)들이 왜놈들에게 공 격을 가하자 일경은 더 잔악해졌다. 김맹도리(金굶道里)를 체포할 길이 없자 조 부이신 김학서옹을 경찰청에 중부님 대신 수감해 놓고 갖은 협박, 심지어 고문까 지 하니 노쇠(老훌)한 몸에 기진맥진하여 사경을 헤매이게 되니 자식의 도리로서 자식의 일로서 아버님을 돌아가시게 하겠느냐 하며 자진출두(自進出頭)하였다. 그 후 조부님은 방면이 되고 중부이신 김맹도리는 광주지방법원(光州地方法院) 전주지원(全州支院)에서 장기(長빼) 7년형을 받고 투옥되어 1년 뒤에 대구형무소 (大邱페務所)로 이감되어 잔여형기(殘餘페期)를 마쳤다는 사실을 중부({'f父)님께 서 직접 저에게 말하여 주셨던 사실(事實)을 증언(證言)하고자 합니다. 1985년 10월 28일 證言人 全北南原빼下;;11:洞 41-1 金 l:f’ 꿇~ 0925年 3月 30 日 生) 92 부천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