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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이 총탄에 맞아 쓰러지자 중부(件父)이신 김맹도리는 힘이 장사(빠士)이기 때 문에 병정청(兵T廳)에서 탈취한 총 개머리로 5. 6명의 왜경을 후려치는 도중 하 복부 쪽에 몽둥이로 얻어 맞은듯한 통증을 느꼈으나 우선 그 자리를 피하고 나 서 정신을 차려 살펴보니 허리 아래 부분에 총탄이 관통되어 심한 총상(샀傷)을 입었으며, 관통된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가 온몸을 적시고 신발까지 흥건하게 고 였다 합니다 왜경은 그 후 의병들의 뒤를 쫓아 수사를 폈다. 그날 참열(參列)했던 의병들이 속속 드러나고, 왜병들이 면면촌촌(떼떼村村 ) 수색이 시작되었다. 선생은 다친 몸 을 이끌고 수사망을 피하여 은신 (1첼身)하며 치료를 받았다 몇 달이 지나고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되자 동지들의 근황이 궁금하여 남원 장 날 사람이 많은 것을 이용, 남원에 들렸다가 돌아오던 중 고룡동(넌f댄패) 매산(짜 山) 모퉁이에 이르자 왜경 갈무대 8명이 잠복하고 있다가 뒤어나오며 “꼼짝마라 너를 기다린지 오래다” 하면서 놈들이 달려들었다. 이에 왜경 갈무대 한놈을 가 슴을 후려쳐서 다리를 잡아 벙글벙글 돌리며 달려드는 놈을 사람으로 치자 감히 덤비지 못하고 그들은 슬금슬금 도망가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그 위기를 모면하고 그 후로도 계속 피하다 보니 심신이 피로하여 어느 날 허기진 몸을 이끌고 집에 들렸다가 잠복 중이던 왜경에 체포되어 군법 회의(뭔法렘議)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그 당시 남원 동문(東r'j) 밖에 있는 감옥에 투옥되었다. 당시 창평(룹平) 의병장 고진사(高進士)도 체포되어 그 분도 사형언도를 받아 같은 사형수감방(死쩌因앞房)에 수감되었다. 고문을 당하여 폼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기진맥진하여 있는 중부(빼父)에게 고진사(高進土)는 “맹도리(굶道뿔) 걱 정 마소 저놈들은 우리를 죽일 수 없네, 살아날 수 있네” 고진사는 힘이 장사이 며 축지법(縮地필)을 했다는 사람인데 왜병들도 이 분을 함부로 할 수 없었는지 “삼”으로 새끼를 꼬아 손을 화지기 지워 천장 대들보에다 매어 놓았다, 그런데 고진사는 “맹도리 소변이 마려우면 한쪽 구석 한곳에다 보게” 하더랍니다, 드디어 사형집행을 단행할 전날 밤이 되었는데 교대할 파수병이 “사무이까” 하 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런 대답이 없자 밀려오는 잠을 참기 위해 개머리판으로 땅을 둑룩 치며 군가를 부르더니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 때 이욱고 코를 드르렁 드르렁 고는 소리가 감옥을 진동하였다, 이옥고 고진사는 적은 소리로 “맹도리 저것 보게 저것이 우리가 살길일세” 하더니 화지기 지워 놓은 포승을 힘을 불끈 쥐어 버티니까 우드득 소리와 함께 포승은 끊어지고 고진사는 날렵한 몸을 날려 구석으로 가더니 소변을 누어 흙이 젖어서 축축한 방바닥을 손을 넣어 파더니 구들장을 잡아당기어 큰 방석만한 구들장을 불끈 들어 방 한가운데다 갖다놓고 두루마기를 벗어 그 위에 덮어놓으니 마치 사람이 누워있는 것 같이 보였다. 그 리고 “맹도리 이리 오소” 하더니 들어낸 구들장 밑에 사람이 기어나갈 수 있을만 lJI. 광복후 부천거주 독립운동가 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