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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되어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6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유족으로는 손(孫) 김 일권(金-權) , 손부(孫웹) 문극분(又極*0)이 있다, <참조> 김찬두(金讓斗) 섣생의 조카 김갑동(金甲童)씨 증언 기록문 본인은 남원군(南原떼) 기지면機池面) 고룡동(퍼龍洞) 농업 김맹도리(金쩌펴 'I!.) [호적명 · 김찬두(金讀斗) 당시 27세]에 대한 항일투쟁(抗日|챔웹) 사실에 관하 여 아는 대 로 사실을 증언(~풍름 )하겠습니 다. 김맹도리(金돼펴필)는 본인의 중부( 1 111父)이시며 김맹도리라는 이름은 별명(別 名)이시고 호적상에는 김학서(金學瑞)의 자(了) 김찬두(金讀斗)입니다. 원래가 힘이 장사(;1영土)여서 200근이 되는 물체를 마음대로 던지시고 씨름판에 서 상으로 받은 황우(黃牛)만도 27두(없)나 되 었다고 합니 다. 또한 애국심(愛國心)과 의협심(義俠心)이 강하여 불의를 미워하딘 중, 때는 1906년 왜인(俊人)의 침략으로 국운이 날로 쇠퇴(꽃退)하게 되자 각처에서 의병 이 봉기하여 한일합병(합 R 合함)을 반대하고 왜병들과 싸우는데 당시 나이 24세 의 청년 김맹도라는 이 를 좌시(坐視)할 수 없어 남원(南原) 의병대장(義兵隊長) 양문찬(梁文贊)의 휘하에 들어가 선봉장(先짧將)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각처를 돌아다니며 왜병들을 습격(짧摩) 재물을 탈취하는 등, 항일운 동(抗日運動)을 하던 중 전남지방 일원에서 봉기한 의병 약 200명이 창평(昌 平) 땅 고진사(高進土)의 휘하에 모여 광양(光P易) , 곡성(삼城) . 구례(求禮) . 순천(順天) 등지(等地)의 왜병을 무찔러 함락시키고 일군(日軍)이 남원으로 진격하여 올 것 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들과 합세하여 1906년 12월 30일에 양력설(新正)을 기 화로 휴가 가는 등 왜경들의 경비가 허술한 틈을 타서 남원을 함락시키기로 그 틀과 약속하고, 그날 밤 남원 조산요천(南패 造山청川)가에 약 200명의 의병이 모여 먼저 진위 대(鎭衛隊)를 쳐부수고 5연발총(述發抗) 50정(↑廷)과 약간의 탄약을 탈취하여 병정청(內T廳) 후정(後헬)에서 총을 사용할 줄 모르는 의병에게 총 쏘 는 법 융 가르치다가 오발사고로 남원의병대장(南原義兵隊長) 양한규(梁漢奎)가 애석하게도 총탄에 맞았습니다, 그러나 의병의 사기에 큰 타격이 될까하여 참모들은 그 사실을 숨기고 김맹도 리의 지휘 아래 즉시 경시청(警視廳)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경시청 왜경들은 이미 비상망을 펴고 경비하고 있었고 그 사실을 모르 는 의병들은 경시청 문을 박차고 “위계라”하고 쳐들어갔으나 경비하고 있던 왜경 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사격을 가해왔다 먼저 쳐들어갔던 의병 약 10여 90 부천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