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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선생은 이 사건의 주모자로서 경성지방법원(京城地方法院)에서 재판을 받아 그 해 9월에 징역 4년형을, 정명옥 · 김봉준 · 송암우는 징역 1년 6월, 김운용(金공用)은 징역 1년, 정석조는 금고 3월형을 언도 받았으며, 선생 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4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훈 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부천에 거주하는 유족으로는 손(孫) 김영철(金永澈) ) 손부(孫歸) 김양순 (金養順)) 증손(曾孫) 영 화(哈和) . 현호(見好)가 있다. @ 參考文敵 · 日 帝{훌略下韓國36年史(國家報勳處) 第8卷 491 . 520 . 526 . 527面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l卷 484 . 498 . 536面 韓國獨立史(金承學) 下卷 116 . 122面 騎廳隨筆 350. 351面 韓國人名大事典(新.õ::文化社) 1967) 132面 獨立有功者功勳錄(國家報勳處) 第l卷 552面 7) 김 찬 두(金 覆 斗) (1876. 2. 16 - 1959. 5. 5) 이명 : 맹도리(굶道里) 김찬두(金贊斗) 선생은 전라북도 남원군 기지 면 고룡동(南原都 機池面 古龍洞)에서 농업에 종사하던 김학서(金學瑞)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선생은 원래가 힘이 장사이고 의협심이 강하 였으며) 1906년 24세 때에 남원 의병대장 양문 찬(梁文贊)의 휘하에 들어가 선봉장이 되었다. 1907년 2월 12일 의 병 장 양한규(梁漢奎) 휘 하 의병 120여명과 함께 총과 탄약을 구하기 위하 여 각자 화승총과 죽창으로 무장하고 남원진위대(南原鎭衛隊)를 습격하여 보관중이던 총기와 탄약을 탈취한 후 피체되었다. 그로 인하여 선생은 1909년 10월 8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징 역 7년형을 언도 받았으나 1912년 9월 13일 특사로 형집행(페執行)이 면 ill. 광복후 부천거주 독립운동가 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