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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l피:i댄폐l史( I햇!家쐐勳處) 第468mi 獨~Ú:쥐功j짤功勳錄(1행l家報勳處) 第5卷 886ffiî 5) 김 수 담(金 壽 懶) (1852. . . - 1896. 3. 29) 김수담(金뚫빼) 선생은 경북 의성(꿇城) 사람이다. 선생은 경북 의성(꿇城) 일대에서 김상종(金象짧) 의진(義陣)에 참가하 여 활약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의 변보를 전해듣고 비분강개하였으 며, 이어서 일제와 친일정권에 의해 단발령까지 강행되자 그 분노는 폭발 하여 토역복수(討팽復뿔)를 부르짖고 의병운동이 전개하였다. 이 때 영남 지방에서의 의병 봉기는 태봉(Bf=ì峰) 전투에서 실패한 후, 안동부를 중심으 로 의병장들은 다시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하여 전투를 준비하였다. 그 중 안동 의병진은 김도화(金追재)를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병력을 보충하여 안동읍을 중심으로 진영을 설치하였다. 경북 의성 지방에서는 이같은 시기에 김상종(金象鍾)을 중심으로 의거 하였다. 김상종 의진은 의병장에 김상종 · 소모장에 김수욱(金壽旭) . 중군 장에 권대직 (權大樓) . 관향장에 김수협(金壽英) 등으로 편성되었다. 이 때 선생은 의병진의 선봉장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이 시기 경북지역에는 의 성지방 뿐만 아니라 영양의 김도현(金道鉉) . 진보의 허훈(許薰) 등이 의 병을 일으켜 호응하고 있었다. 김상종 의진은 황산(黃111)을 점거하였으나, 1896년 3월 29일 일본군과 접전하여 그들의 우세한 화력 앞에 수많은 사 상자을 내고 분패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선봉장 김수담(金壽聊) 선생과 관향장 김수협 등이 전사 순국하였다. 그러나 김상종 의진은 을미의병이 종결된 이후 을사록약(ζE웹j約)의 내용이 알려지자 각지의 유림들에게 통문을 보내 재 궐기를 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 였다. 부천에 거주하는 유족으로는 고손(高孫) 김희덕(金照德) , 고손부(高孫 歸) 손문숙이 있다. @ 參考文IÆ:J: : 별金城百五十隨(筆寫本, 190이 III. 광복후 부천거주 독립 운동가 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