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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김 성 환(金 聖 煥) (1919. 12. 8 - 미 상) 호(號) : 송암(松岩) 김성환(金聖煥) 선생은 평남 강서(江西) 사람 이다. 일본 동경 전수대학(專修大學) 법학부(法學部) 를 졸업 하고 1944년 1월 20일 일본군에 강제 징 집되어 평양에 주둔한 일본군 42부대에 배속되 었다. 당시 일본은 무모하게도 전쟁을 중국대륙 에서 다시 태평양상으로 확대하여 놓고 그들의 부족한 인적 자원을 충당하기 위하여 지원병 . 징병. 징용 등의 명칭으로 우리 국내의 수많은 청년들을 전쟁터로 끌어내 었다. 우리 임시정부에서는 일본군에 징집 당한 동포 청년들을 불러모으 기 위하여 광복군이 현지의 중국측과 의논하여 그 실천에 옮기도록 추진 하였다. 광복군 전방 공작원들의 활동이 접점 확대 강화되고, 또 전쟁의 대세가 하루하루 일본측을 궁지에 몰아넣게 되었다. 선생은 1944년 2월 중국전선에 배치되자 전이호(全屬鎬) 등 동지를 규 합하여 일본군을 탈출하였다. 선생은 1944년 6월 16일 안휘성 부양 지역에서 이 무렵 철기 이범석(李 範奭) 장군이 이끌던 광복군 제2지대에 장준하(張俊河) . 김준엽(金俊摩) 등 수많은 학도병 출신들과 함께 광복군에 입대하였다. 1944년이 접어들면서 광복군의 전방 초모공작(招幕工作)에 의한 애국청 년의 증가와 일본군내 학도병의 대거 탈출 입대가 이어지자 <한국광복군 간부 훈련반>인 한광반(韓光班)을 현지 중국군 하주국(何柱國) 사령관과 교섭하여 중앙 육군 군관학교 제 10분교를 특설하였다. 한광반 설치의 주요 목적은 첫째, 한국독립 전선에 필요한 간부양성 둘째, 중국군과의 연합작전 기능의 강화 셋째, 독립 후 국군의 기간요원으로서의 간부화 등이었다. 한광반의 군사훈련과정은 중국군 군사교관이 담당 지도하였으나 그 밖 의 과정은 김학규 지대장이 직접 훈련주임이 되어 주로 정신훈련과 사상 선도에 주안을 두어 한국 독립 운동사를 비롯한 임시 정부의 연혁 · 광복 III. 광복후 부천거주 독립운동가 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