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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이런 운동을 전개한다 해도 조선에는 2개사단의 일본군이 있으며 기민한 경찰망이 있기 때문에 도저히 효과가 없을 것이다”라는 요지의 훈시를 함으로써 한국인 학생들을 크게 분개시켰다. 또 학생들을 실습장 소로 내보낸 후 경찰이 한국인 학생만의 물품을 수색함으로써 44명의 한 국인 학생이 퇴학원서를 제출하는 사건이 있었으며 이로 인해 다시 주모 자 학생 6명이 퇴학당하였다. 18개월 동안 미결수로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김찬도(金燦追) . 권영선 (權永善)만 보안법 위반으로 공판에 회부되고 선생 등은 1930년 2월에 경 성지방법원에서 면소(免訴) 판결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인정하여 1980년에 대통령 표창, 1990년 건 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부천에 거주하는 유족으로는 손(孫) 고광환(高光煥) , 손부(孫歸) 정완희 (鄭完姬), 증손(曾孫) 주희(周希) . 현철(鉉喆) . 현필(鉉弼)이 있다. @ 參考文敵 : 日 帝慢略下韓國36年史(國史編훌委員會) 第8卷 907面 東亞 日 報0928. 9. 16字, 9. 18字) 韓國獨立史(金承學) 下卷 311面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9卷 673 . 675面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3輯 546面 水原農學 70年(서울農大 1976) 50-52面 獨立有功者功勳錄(國家報勳處) 第6卷 224 .. 225面 3) 김 규 철(金 奎 喆) (1881. 1. 5 - 1929. 7. 16) 호(號) : 비 장(飛將) 김규철(金쫓喆) 선생은 충청북도 단양(月陽) 출신이 다. 1907년 8월1일 군대가 일제에 의하여 강제 해산되자 일찍이 한말(韓末) 에 내부주사(內部또事)를 지낸 바 있던 선생은 충북 단양을 근거지로 삼 아 이명상(李明相)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중군장(中軍將)이 되었다. 처 음에는 의진(談陣)이 50여 명에 불과하였으나 이유고 수천 명을 소모(검 줬)할 수 있었다. III. 광복후 부천거주 독립운동가 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