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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에 이바지하기 위해 농민대중을 계발하여 신 사회 건설을 목적으로 항 일 학생결사 건아단(健兒團)을 조직하였다. 그들은 먼저 농촌사회의 계발이 곧 독립운동의 기초가 된다고 보고 그 들와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농민을 계몽 지도하는데 힘을 쏟았으며, 야학 교(夜學校) 또는 조합(組合)같은 단체를 설치하였다. 이는 조선의 전문학 생 비밀결사로서는 한국 초유(初有)의 것이었다. 그들은 수원군 안룡면(安龍面) 고견리(高훌륭里)를 비롯한 부근 여러 마 을에 농민야학을 설립하여 농민의식을 고취하는 등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이때 단군연호(樞君年號)를 사용한 것이 후일에 말 썽이 되었다 그러던 중 1927년 9월 북도(北道) 지방을 수학여행 할 때에 강원도 등 지에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대규모 농장을 본 건아단원들은 그 식민성 농 장에 분개하여 민족농장 건설의 꿈을 키우기도 하였다. 그 후 1928년 6월에 건아단은 일본 동경에 본부를 둔 조선농우연맹(朝 蘇農友聯盟)의 <조선인에 대한 조선 농촌 개발> 이라는 주장과 그 뜻이 같다 하여 이에 가맹한 후 그 지부를 두었다. 그리고 동년에 조선농우연 맹이 국내에서 지방강연 등 계몽활동을 할 때 수원고농의 학생이 연사로 참석하였는데 이때 일제에 의해 강연활동이 중지되면서 여기에 연사로 참 석하였던 수원고농생 한전종(韓典鍾)은 학교에서 무기정학을 당하였다. 이 때 건아단의 조직은 발각되지 않았으나 단원들은 사태를 중시하여 단명 (團名)을 계림농흥사(짧林農興社)로 개칭 위장하였다. 그런데 건아단 출신으로 김해군 고등농림학교 선생으로 추천된 김성원 (金聲遠)이 동 학교에서 조선학생들에게 조선어 시간에 이 주의를 선전한 것이 발각되어 일경에 검거되었다. 이로 인하여 1928년 여름 계림농흥사는 다시 조선개척사(朝應開招社)로 조직을 개편하였으나 사건이 확대됨에 따라 동 결사의 조직이 드러나게 되어, 수원고등농림학교 기숙사를 습격한 일경에 의하여 1928년 9월에 전 회원과 함께 고재천(高在千) 선생은 일경에 피체되어 수원경찰서에서 취 조를 끝내고 검사국으로 송국(送局)되었다. 수원고농의 개척사 문제를 경찰에서 취조하고 있을 때 학교 당국은 개 척사 학생 11명을 퇴학처분 하였다. 그리고 고농 교장은 한국인 학생들을 모아놓고, “조선인의 운동은 일부 불량 조선인의 행동인 것이며, 그들이 82 부천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