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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하고 여관으로 돌아와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함을 분개하여 분연히 눈 물을 흘리다가 열혈을 한 접시 가량 토하고 약 30분간 기절하여 인사불성 까지 되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선생은 안병찬과 함께 일경의 매서운 감시와 역 경을 이겨가면서 변호사 업무를 끝까지 지원하였다. 1911년 1월 여순에서 돌아온 후에도 안병찬의 독립운동을 하는데 고병 은 선생은 일신상의 위험을 무릅쓰고 지원하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어 징역 1년 6월을 언도 받고 평양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 였다. 부천에 거주하는 유족으로는 증손(曾孫) 고희수(高熙秀) . 고영수(高永 秀)와 고손(高孫) 명환(明煥) . 재일(載一) . 명진(明鎭)이 있다. @ 參考文鳳 : 安重根義土 自 샀傳(安重根義土렇폈웹) 497 . 498 . 520 . 522面 廣-寧i힘ai호6홈 32面 獨:lz:i펀파J'J:'.資料集(國家報薦j處) 第lll!if:i: 58 . 63 . 447面 大韓每 더 新報(1910. 1. 27) 獨立有功者功勳싫(國家報勳處) 第9卷 26ã퍼 2) 고 재 천 (高 在 千) (1906. 9. 1 - 1981. 5. 29) 고재천(高在千) 선생은 ‘ 전라남도 담양군(澤陽 컴ß) 창평면(昌平面) 용수리 (龍水里) 사람이다. 당시 일본에서 각 관 · 사립 대학생들의 주의자 급 학생 사회과학연구에 대한 비밀결사 사건이 빈번한 이래 조선의 전문학부인 수원 고등농림학 교 농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선생은 1926년 여 름에 동교생 육동백(陸東百) . 김찬도(金燦道) . 김 익 수(金益洙) . 황봉선 (黃鳳善) . 김 민 찬(金攻贊) . 남영희(南榮熙) . 권영선(權永善) . 우종휘(禹鍾微) . 김봉일(金奉日) . 백세 기(白世基) 등 10여명과 함께 학교 뒷산인 여기산(麗技山)에 모여 민족사 I1I. 광복후 부천거주 독립운동가 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