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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1년간 관비로 수학했으나 졸업 사정회에서 우등생이기는 하나 전과자 기록으로 공립학교 임용이 불가능하여 당시의 각종학교인 보인학교(현 輔仁商高)에서 3년간 의무 봉직을 했다. 학생을 열심히 지도한다고 모범 교사가 되어 일본 정부의 관비로 학사시찰을 일본으로 42일간 다녀와서 사직원(解職願)을 냈다. 이유는 일본에 가보니 일본의 교육은 노예를 부 리는 방법의 교육이고 한국의 교육은 노예로서 인내심으로 순종하도록 만드는 교육이어서 교육목적이 독립과 다르기 때문이다. 법을 알아야 하 겠다며 경성법정학교 3년제 야간부를 졸업하고 경성매일신문사 기자로 근무했으나 보도기사가 문제되어 강제 퇴직(罷免)을 당했다. 해방을 맞이한 선생은 허약해진 나라를 바로 세우고 부강한 조국을 건 설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과학의 기술을 가르쳐 경제적 강국을 만들어야 다시는 이 땅이 식민지가 되지 않으며 또한 심성이 불량한 자에게 기술을 가르치면 악용하니 사람다운 사람을 키워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 다. 선생의 수염은 이북인 강원도 양구(楊口)에서 38선을 월경하고 경기 도 안양(安養)에서 생산공장과 민보단장(民保團長)을 역임하여 1950년의 6.25 동란부터 방공호 생활을 하여 자연 생성된 것이었다. 1953년 수복시 부천으로 이주하고 1958년 4월 28일 부천군 소사읍 심곡 리에서 제2차 독립운동인 경제적 독립을 제창하고 공업기술학교를 개교하 여 기술자를 양성하는 2세 교육의 새로운 출발을 하고 졸업생을 전국 각 처에 취직시켰으며 후에 기술교육의 교육과정을 교육부(文敎部)에서 요구 하면서 장학관과 편수관이 6개월간 매일 등교하여 교육과정을 계속 확인 하고 전국의 실 업 학교(實業學校)인 공고(工高) , 농고(農高) , 수고(水高) 수 업시간표에 실습시간을 삽입하고 실습시설을 완비하여 재학생이 실습시간 에 실기(實技)를 연마하여 졸업생이 취직 할 수 있는 문호를 개방한 한국 의 선각자적 선구자였다. 이렇게 시작한 학교는 45년이 지난 지금 7천 여 명의 재학생을 수용하는 전국 굴지의 2년제 부천대학으로 성장하고 심화 과정(深化課程)에서는 4년제 학사(學士)- 자격증까지 수여하기에 이르렀다. 몽당(夢堂)은 학생 기숙사 옥상에 방을 만들어 5층에서 생활했으나 “나 를 따르라”는 구호와 함께 모든 면에서 검소한 생활을 실천했으며 겨울의 난방용 기름을 드럼에 모았다가 학생 실습장(實習場)으로 돌려보내기 위 해 이불을 덮고 앉아 직무를 하였다.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낸 선생은 감옥에서의 고문이 몽 속에서 감당하기 III. 광복후 부천거주 독립운동가 77